- ㅇㅁㄱㄴㄴ ㅇㅇ / 아무거나는 없어
“골라봐.”
“응, 아무거나요.”
“아무거나는 없는데, 네가 갖고 싶은 걸 말해봐.”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언제나 ‘아무거나’였어요.
“계획이 뭐니? 뭘 하고 싶어?”
보이지 않는 ‘이래야만’이라는 기준은 무의식의 틀을 만들었어요. ‘이해가 안 가’라는 시선은 스스로를 가두는 벽이 되었죠.
선택해야 하는 질문들 앞에서 나는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이 더 익숙했어요. 그렇게 삶은 흐르고 흘러, 스스로 묻는 날이 왔어요.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알게 모르게 외면했던 것들.
취향이 삶을 매력적이게 만든다는 걸, 살아보고서야 알게 되었어요.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인 나의 취향은 정상과 비정상, 일반과 독특의 경계와는 상관없이 내게 평화를 주었어요.
세상은 본래 다름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손가락 하나하나의 길이가 다르고, 내 두 다리의 길이가 다르듯, 나무마다 가지 뻗는 방향이 다르듯, 사람도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요. 그 다름이야말로 생명력의 원천이고 획일성 속에선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좋아하는 것에도 보이지 않는 강요는 있었어요.
정상과 비정상, 일반과 다름을 나누는 선.
이렇게 살아야 보통의 삶이라고 하는 선 말이죠.
어떤 이들은 기존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인간다운 존엄을 달라고 외치는 것을 가끔 보게 돼요. 그 다름의 문제인 성소수자 권리와 차별금지법 논란도 그 선 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천 원의 행복이 직장생활의 낙(樂)이 된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공연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뮤지컬로 이어졌어요. 그중에서도 충격적이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렌트’는 내게 큰 여운을 느끼게 했어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렌트’에는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성적 지향 및 직업을 가진 이들, 게이 커플, 트랜스젠더 공연 예술가, HIV에 감염된 뮤지션, 가난하고 아프고,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했어요.
그 다양한 다름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우정을, 특히 “Seasons of Love”라는 노래에서 난 느낄 수 있었어요.
“How do you measure, measure a year?”
“In daylights, in sunsets, in midnights, in cups of coffee”
“How about love? Measure in love. Seasons of love.”
사랑은 특정한 형태가 아니었어요.
서로의 다름 속에서 그저 아끼고, 울고, 노래하는 그 모든 순간을 사랑이라 부르고 있다고 느껴졌어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에 잠식되지 않고 사랑으로 기억하는 그 시간.
지금의 내가 이 뮤지컬을 다시 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져요.
또 여전히 시도하지 못한 취향 중의 하나는 영화제 참여인데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도 가 보진 못하고 기사로 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중에 눈길을 끈 것이 있었어요.
영화 ‘결혼 피로연’.
윤여정 배우가 동성애자 손주를 둔 할머니로 나오는 영화였어요.
특히 “넌 내 손자야.”라는 할머니의 대사에 관한 글을 여러 기사에서 볼 수 있었죠.
뮤지컬 ‘렌트’에서 본 사랑의 형태가, 윤여정 배우의 ‘넌 내 손자야’라는 말에서 다시 들리는 듯했어요.
실제로는 윤여정 배우가 큰아들의 동성 결혼식을 열어준 것이 기사화된 적이 있었고 “너는 내 손자야”라는 말이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라고 인터뷰해서 그 의미가 더 큰 것처럼 보였어요.
어떤 기사에서는 ‘고백’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기도 했어요.
고백.
그 단어에 솔깃했던 건, 나 역시 여전히 비밀스럽고 고백하지 못하는 은밀한 무언가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일상의 이곳저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다름은, ‘편견은 깨야 해, 그리고 겸손해야 해’라는 내 지향점을 통해 여전히 내게 질문을 던지곤 해요.
나는 정말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받아들이는 척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다름을 인정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분열을 느끼게 해요. 사회도 그렇겠죠? 혐오가 일상어가 되고, 폭력이 정당화되고, 누군가는 숨죽인 채 살아가야 하는 그런 것.
‘다(多)’, 다양성 그리고 다름을 받아들인다는 건 단지 관용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가 아니라 “네가 그렇게 사는 게 자연스러워”라고요.
다름을 긍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앵무새처럼 흉내만 내던 ‘긍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크고 작은 인생의 고민을 거쳐 오면서였어요.
주어진 현실과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긍정’이라는 것을요.
그런데 다름을 긍정하는 데에는 ‘용기’도 필요했어요.
‘렌트’의 등장인물들은 완벽하지 않죠. 실수도 하고, 상처도 주고, 때론 비겁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지우려 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다름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요.
‘결혼 피로연’의 할머니도 처음부터 모든 걸 이해한 건 아니었을 거예요. 어쩌면 당황했을 수도, 두려웠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넌 내 손자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과연 내가 가진 다름을 알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그의 용기를 격려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어느 다른 국민보다 관계지향적인 성향을 가진 국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일까요? 이 다양성은 어쩌면 ‘생존의 조건’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름이 차이가 되어 비난받고, 두려움으로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런 삶 말이죠.
뮤지컬 ‘렌트’에선 말해요.
“No day but today.”
어제의 편견에 갇혀 있을 시간이나 내일을 두려워할 여유도 없다고.
지금 이 순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고요.
누군가 나의 지나온 시간을 사랑이라고 불러준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요?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의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또 어떤 모습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