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ㅊㅁㄱ ㄱㅁ / 체면과 가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회의장에서 정말 오랜만에 은사님을 만난 적이 있어요.
너무나 반가워하시며 하신 첫마디의 말씀.
“너! 왜 이렇게 살쪘어?”
이 쩌렁쩌렁한 말에 모든 시선은 내게 꽂혔어요. 난 쥐구멍을 찾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죠. 분명 웃고는 있었는데 어떤 표정이었을지는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당시 사회 초년생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도 당당하게 이 말씀을 드렸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사회적 체면이 있는데.”
이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기억나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것 같은 일 사이에서 흔들릴 때였어요. 당시에는 ‘그래, 그래도 이 정도는’이라는, 마치 귀여운 허세를 부리는 말로 느껴졌었죠.
하지만 이 말은 울타리 너머의 세계와 자유롭게 뛰놀고 싶은 울타리 안의 양의 마음이 절묘하게 담겨있다고 느껴졌어요.
‘체면’이란 말은 참 묘한 단어인 것 같아요. 얼굴 체(體), 낯 면(面). 몸의 얼굴이라는 뜻이죠. 개인의 얼굴이 아니라 사회적 얼굴. 타인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아니 내놓아야만 하는 모습 말이에요.
집들이 손님을 위해 집을 정리하거나 경조사에 참석할 때 옷을 단정히 하는 것, 회사나 학교에서의 경쟁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 애쓰는 것과 같이, 체면은 단순한 자존심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나를 지켜주는 갑옷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나를 가두는 틀이기도 했어요.
생각해 보면, 일종의 ‘조건’처럼 기능한 것이 체면이었던 것 같아요. 관계를 시작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 공동체에 속하기 위한 충분조건으로 말이죠. “체면을 구긴다”는 표현이 단순히 창피함을 넘어 사회적 배제의 위협을 담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일 거예요.
문득 면접(面接), 면회(面會), 대면(對面)과 같은 ‘면(面)’자가 들어간 단어들이 떠올라요. 모두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한다는 의미겠죠. 면접은 평가받는 자리, 면회는 제한된 만남, 대면은 피할 수 없는 직면이라는 상황일텐데요. 이 모든 단어에는 긴장감이 배어 있어요.
이렇게 무엇인가를 마주한다는 것이 왜 두려운 일이 될까요?
전화를 받거나 거는 것을 불편해하고 사소한 전화 통화조차 기피하는 증상인 ‘콜포비아(Call Phobia)’라는 말이 있죠. 메시지는 글자이지만, 전화 통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목소리나 얼굴에서 느껴지는 표정, 눈빛, 침묵까지 다 마주해야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거죠.
마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죠. 상대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감지해야 하고, 내 말과 행동들은 숨길 곳이 없어지죠.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셈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점점 ‘마주하지 않는’ 방법을 찾게 된 것 같아요. 전화 대신 문자를, 대면 회의 대신 이메일을, 직접 말하기 곤란할 땐 읽씹. 마주하지 않으면 체면을 잃을 일도 없으니까요.
체면을 디지털화한 SNS는 심지어 체면 관리 기능까지 하게 되었죠. 예전에는 타인과 마주하는 순간순간 체면을 관리해야 했다면, 지금은 업로드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수정하고 삭제하고, 다시 쓰거나 아예 없었던 일로도 만들 수 있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체면을 관리하기는 더 어려진 것도 같아요. 체면을 지켜야 할 대상이 팔로워뿐 아니라 잠재적인 조회수에 해당하는 수많은 사람에게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이렇다 보니, SNS를 하는 그 이유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일단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죠.
한편 요즘 MZ세대의 면(面)은 더 흥미롭고, 어떤 상황에서는 부럽게 보일 때도 있었어요. 그들은 ‘체면’ 보다는 ‘효율’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불필요한 형식을 거부하고, 본질에 집중하려는 태도 말이죠. 함께 일하면서 종종 느끼곤 했는데, 그것이 아예 모토이자 장점으로 내세우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요즘 인기 있는 유튜브를 보면, 예전에는 절대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았을 모습들이 가득해요. 잠에서 막 깨어난 맨얼굴, 지저분한 방, 실패한 요리, 부스스한 헤어스타일과 같은 일상의 자연스러움에 “공감돼요”, “저도 그래요”라는 반응이 쏟아져요. 관찰예능도 그런 측면을 이용해 시청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는 거겠죠.
이런 시대 분위기에 MZ세대가 완벽한 체면보다 진정성 있는 모습,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선호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여요. 물론 이것 역시 하나의 페르소나일 수도 있을 거예요. 계산된 ‘자연스러움’, 기획된 ‘솔직함’ 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적어도 내가 지나온 시간과는 진행 방향이 달라졌어요. 완벽하게 포장된 체면에서, 결함까지 드러내는 진솔함으로 말이죠.
그렇다고 이런 변화가 체면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꺼에요. 그 기준이 다를 뿐, MZ세대도 여전히 자신만의 ‘면’을 관리하고 있어요. 전통적인 체면이 부족함이나 모자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면, 요즘의 체면은 ‘솔직’, ‘일관성’, ‘자기다움’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결국 우리는 어떤 순간, 어떤 가면을 쓰고 살아가죠. 예전 세대는 ‘체면’이라는 견고한 가면을, 이후 세대는 ‘인내’라는 가면을, 그리고 요즘 세대는 ‘진정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어쩐지 가면 뒤의 진짜 얼굴은 평생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인식하는 ‘나’조차 이미 수많은 타인의 시선을 거치게 되고, 혼자 있을 때조차도 내면화된 타인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SNS 속의 얼굴이나 페르소나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건 그 가면이 나를 숨기는지, 아니면 나를 드러내는지가 아닐까요?
‘면(面)’은 인간에게서 결코 사라질 수는 없을 거예요. SNS가 더 발전하고, AI가 우리 대신 소통을 한다고 해도 우린 여전히 ‘어떻게 보일지’를 고민할 테니까요.
그래도 어떤 순간에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누구 앞에서 어떤 가면을 쓸지. 그리고 그 선택이 타인의 기대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의지인지를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보여지는 것에 대한 관심이나 생각 이상으로 꽤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돼요.
직장에서 얼굴,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얼굴, 혼자 있을 때의 얼굴, 그 모든 얼굴이 ‘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진실된 얼굴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그 모든 얼굴이 서로 멀어지지 않도록, 어느 하나가 나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 그것이 나의 ‘면(面)’과 공존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 얼굴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고 그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