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ㄴㅇ ㅈㄹ / 나(我)의 자리
‘아(我)’
한참 입을 뗄 수가 없었어요.
여전히 모르겠고, 앞으로도 모를 것만 같은 존재. 그것이 사실은 ‘나’거든요.
‘애늙은이’라는 말을 듣던 초등학교 시절부터였던 것 같아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꾸 생각했어요.
“나는 누구일까? 왜 이렇게 생겼을까?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런 생각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함께 자라났죠. 청소년기가 되자, 주변인들과 세상 속에 ‘나’를 비춰보게 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급기야 고쳐보게도 했어요. 결코 쉽진 않았지만요.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고 하죠. 그런데 그때 든 생각은 누군가를 내가 고치려는 건 안 될 일이지만, 스스로 자신을 고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끊임없이 저도 모를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정답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스스로 위안이 되고 용기있게 나를 살아가게 했던 것은, 윤동주의 ‘서시’의 한 구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었어요.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는 일’, 이것은 마치 해법이 되어 큰 힘이 되어 주었죠.
그런데 세상이 아닌 나를 고치려는 마음은 때론 내 자신을 곪게 만들기도 했어요.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 생각이 ‘어떤 문제도 내 안에 있다’로 의식되는 경우가 많아지더라고요. 언젠가부터 내 속의 나를 발견하려는 소소한 노력들은 오히려 자기착취로 이어지기도 했어요.
“나답게 살아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던 시절도 있었죠. 그러나 이것은 ‘지금의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처럼 들려 나를 애닯게 만들기도 했어요. 요즘은 어떨까요? ‘너로써 충분하다’, ‘괜찮다’는 것이 트랜드가 된 것처럼, 이런 주제의 에세이, 시집, 인디음악 등이 이미 문화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흐름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는 사실 너무 잘 알 것만 같아요.
늘 더 나은 내가 되려는 사람은, 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유능해야만 할 것처럼 느껴지죠.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기반은 ‘성실’이었고 그것은 ‘성장’으로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소모’로 바뀌었어요. 이 시대에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세계보건기구(WHO)가 ‘Mental Health at Work’를 발표하며 번아웃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만 여겨지지 않게 되었어요. 이제 번아웃은 개인의 약함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요. 직장에서는 괜찮아 보이던 사람이 퇴근 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현상, 이젠 ‘토스트아웃(toast-out)’이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해요.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잘 사는 건 또 무엇일까요?
내게 있어 충분한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런 고민은 문학 속에서도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왔어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선과 악, 타인의 시선 속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자신만의 세계를 마주하죠. 그는 타인을 넘어서려 한 게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하고 넘어서는 법을 배우게 되죠.
이것은 니체가 말한 초인, ‘위버멘쉬(Übermensch)’의 여정과도 닮았어요. 니체가 말한 초인이란,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라고 해요. 나를 넘어설 때 비로소 나 자신이 된다는 이 말은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괴롭히던 나로부터 벗어나도 괜찮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요.
이상 작가가 '날개'에서 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라는 말도 비슷하게 느껴져요. 주인공은 현실의 무력함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잃어버렸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욕망을 놓지 않아요. 그의 날개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자, ‘나를 넘어 새로운 나로 나아가려는 본능’이었겠죠.
진짜 넘어서야 할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이상적인 나’일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를 만들게 하는 것 같아요. 모두가 나에게 묻는 것만 같죠.
“너는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있니?” 그 질문에 답하려다 보면, 어느새 나는 ‘살아가는 나’가 아니라 ‘보여지는 나’가 되어버려요.
하지만 진짜 ‘나’는 보여주기 위한 존재가 아니죠. 있는 그대로 충분히 괜찮은 존재일텐데요.
진짜 나다움은 완벽함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답게 산다’는 건, 사실 ‘나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아닐까요?
‘나를 넘어서려는 용기’는 새로운 가능성을 낳게 될지도요.
성장은 꼭 ‘더 나아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간신히 발판에 발이 닿을 정도로 컸던 자전거를 무릎이 깨져가면서도 신나게 배우던 어린시절이이 생각나요. 다치고 아프고 멈춰서는 순간에도 우린 성장하고 있잖아요. 어쩌면 성장은 이렇게 자신을 깨지고 더 내려놓는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답게 살아라’는 말의 의미는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나를 괴롭히던 ‘나’로부터 벗어나라는 일종의 생존의 언어일지도요.
진짜 ‘나답게 산다’는 건, 존재를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 흘리어 놓아주는 일은 아닐까요?
그렇게 흘려보낸 자리에 비로소, ‘나’라는 이름의 여백이 피어나겠지요. 그 여백이야말로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일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