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信)

- ㅅㄹㅇ ㅂㄱ / 신뢰와 붕괴

by 그레용

"너무 귀여워."

어머니가 보내신 영상 속엔 세 살쯤 된 아이가 있었어요. 배꼽티에 알라딘 바지를 입고, 음악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추는 영상이었죠. 귀여워 웃음이 났어요. AI라고 말하기 전까진.


"그럼, 가짜네. 희안하네~"

어머니 목소리가 식어가는 게 느껴졌어요. 실망에서 두려움으로. 그 순간 깨달았어요. 무너진 건, "내가 보는 게 진짜일 거야"라는 너무 당연해서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믿음이었다는 것을요.


어머니는 이제 종종 확인하세요. "이거 진짜 맞지?" 딥페이크, 피싱이 횡행하는 세상이니까요. 목소리도, 얼굴도 복제되는 시대라서 아예 반응하지 않는 게 상책이 되어 버렸죠. 듣지도, 보지도, 누르지도, 대답하지도 말아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어딘가에 갇힌 듯 답답해져요.


'거짓말 탐지기처럼 심장이 가짜에 반응한다면', 농담처럼 떠올린 생각이 점점 진심이 되어가요. 마치 독에 반응하는 은수저처럼 판단할 수 있다면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매 순간 탐지기를 작동시키며 사는 삶이 정상일 리 없잖아요.


전쟁터에서의 폐허, 무너진 건물,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조차도, 그 댓글엔 "이거 AI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

진짜 그곳에서 누군가 죽어가는데, 픽셀을 확대하며 진위를 따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해지기도 해요. 언제부턴가 정보를 볼 때마다, 언론사 확인이나 팩트체크를 저도 모르게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팩트가 팩트일까 또 의심하게 되는 거죠.


붕괴는 개인적인 동시에 구조적이에요. 내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미디어, 제도, 전문가까지 의심하게 되는 구조적 붕괴가 더 두려운 일이 되고 있죠. 펜데믹 당시, 전세계 지구인들이 느꼈을 두려움이 그것이었을 거에요. 신뢰가 붕괴되고 난 뒤의 일상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해져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어운전을 한다고 사고가 안 나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술 취한 차가 돌진하면 어쩔 수 없듯, 정교한 사기 앞에선 속수무책이에요.


귀여운 아이 춤 영상에 우리가 미소 지은 게 잘못일까요? 순수하게 반응한 게 잘못일까요?

개인의 노력만으로 될까요? 아무리 깨어 있어도, 시스템이 거짓 생산에 최적화되어 있다면요. 아무리 신뢰하려 해도, 신뢰를 악용해 이득을 취하는 구조가 있다면요.


어쩌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건 '무력함' 자체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완벽하게 대비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조심해도 당할 수 있다는 거죠.


다시 물어보게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는 말해요. "사랑하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역설 같지만, 이렇게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의심부터 하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요. 일단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며 생각하는 거예요. 공감이 먼저, 확인은 그다음으로요.


전쟁 뉴스를 볼 때, "진짜일까?" 먼저 묻기보다 "저기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구나"를 먼저 느끼는 거죠. 조작된 이미지라고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그 순간 공감했던 마음만큼은 진짜니까요.


신뢰는 완전히 온전하게 재건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라요. 예전처럼 순수하게 믿는 시대는 오기 힘들 수도요. 하지만 포기할 순 없어요. 매번 판단하고, 때로 틀리고, 상처받고, 그러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수밖에요.

그것이 인류잖아요.


완벽한 신뢰가 아닌, 불완전한 신뢰,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쌓아보는 것.

어느 정도의 불안함을 안고 가는 거겠죠.

언제나 그랬듯, 우린 신뢰와 붕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겠지요. 인간 본연의 다양성을 양손 여기저기에 들고 좁은 줄 위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요.


가짜가 넘치는 세상에서 진짜를 지키는 방법은 우리 자신이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정직하게 보고, 솔직하게 말하고, 진심으로 반응하는 것.

문득 전통시장에 호떡집이 떠올라요. 셀프 계산을 하던 돈이 든 박스 말이죠.

하지만 알아요.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걸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누군가의 걷는 뒷모습, 변해가는 하늘, 변화하는 세상, 그 속에서 그것이 시뮬레이션인지 현실인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을 진심으로 경험하고 있다면, 그게 곧 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신뢰와 붕괴 사이에서, 우린 여전히 살아가요. 완벽하지 않게, 불안하게, 때로 틀리면서요.

누군가 나를 속일 수도 있고, 아무리 조심해도 당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두려움이 오늘 이 순간을 빼앗아가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생각하게 되어요.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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