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汝)

- ㄱㄱ / 공감

by 그레용

일 년에 한 번 정도 기부를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 연락은 세 곳, 네 곳으로 점점 늘어났어요. 큰 금액은 아니지만 개인이 모든 요청을 다 받아들이기엔 부담이 되었죠. 그래서 정중히 거절하는 경우가 생겼어요. 그러면서였던 것 같아요. 처음 통화를 했던 그날의 마음이 점점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오죽하면 전화를 주셨을까 하는 마음에 나름 정중한 거절을 했지만, 전화를 한 사람이나 받은 사람 모두 안타까움만 커지는 그 상황이 마음 한켠에 무겁게 자리해 갔어요.


그날도 같은 고민을 했어요. 전화 온 곳이 지난번에 거절했던 곳이라 결국 가장 적은 금액으로 기부하기로 했죠. 그리고 며칠 후 다른 전화를 받았어요. 정중히 거절해 보려는데 차마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잠시 사정을 듣다 보니, 얼마 전에 기부하기로 한 단체와 단체명이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죠. 나는 바로 이미 연락 주셔서 수락했다고 했어요. 그러자 당황스러운 정적이 흘렀고 잠시 후 듣게 된 말은, 거기랑 다르다고 ‘왜 우리는 안 된다고 하시냐?’라는 원망 섞인 말들이었어요.


당황한 건, 저도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욱! 하고 말았어요. 사무실로 전화하시면 곤란하다고,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고 죄송하다 하고는, 그분의 말이 일단락되는 분위기에 바로 수화기를 내려놨어요.

기부를 했어야 했을까, 나의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앨런 파르두치(Allen Parducci)라는 심리학자는 행복이 상대적인 것이라 “행복한 삶은 경험하는 모든 것 중 가장 좋은 것이 비교적 자주 오는 삶”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이 말은 ‘내가 기쁜 만큼 이 세상 어디에 누군가는 슬플 수 있다’는 평소의 내 생각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되었어요.

그리고 이런 생각은 ‘공감’이라는 단어를 저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했죠.


‘공감’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부분에서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 내가 기쁨을 나눠가지게 되면 누군가는 조금 슬플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공감은 나의 기쁨을 나눠줄 수 있을 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마음이라면 적어도 세상살이가 너무 팍팍하진 않겠다 싶었죠.


어쩌면 기부 전화를 거절하지 못했던 마음에는 이것도 작용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서 어쩌다 쉽지 않은 그 한 번이 훨씬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 같아요.


공감이란 말은 ‘미스 어스 2022(Miss Earth 2022)’에 참여한 한국 대표 최미나수 우승자가 당시 인터뷰에서 언급해 화제가 되었던 말이기도 했어요. “세상에서 바꾸고 싶은 한 가지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이 세상의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공감을 나누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과연 ‘공감’이란 무엇일까요? 무작정 나눈다는 의미만은 아닐 텐데요.

그리고 고통을 나누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경험을 공감하는 일 보다 어렵죠.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산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런 인상적인 글귀를 본 적이 있어요.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공감’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의 표정이 밝아지면 나도 즐거운 마음이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공감이란 것을 어디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다시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죠.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인간됨의 출발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그것이 공감이고 인간됨됨이라고 한다면, 단적으로 철학자의 논리를 비약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알아채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어쨌든 신의 영역으로 느껴졌어요. ‘나’라는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크기와 깊이는 어디까지일지, 나의 인간성이 담긴 그릇은 괜찮은 것인지, 나는 사람구실을 하며 살고 있는지 하고 말이죠.


인생은 생긴 대로 살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는데, 그렇게 생겨먹은 나를 소중히 지키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결국 공감은 그릇과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어요. 각자에게 주어진 마음의 공간으로 타인의 고통을 담아내는 거죠. 중요한 건 그 크기를 비교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공간의 크기를 알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난 종종 착각했던 것 같아요. 내 공간이 무한하다고, 신은 이겨낼 수 있는 고통을 준다고 하니까, 내게 오는 모든 고통은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요. 하지만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은 끊임없이 나타났어요.


수화기를 내려놓던 그날, 나는 ‘심리적 무감각’(psychic numbing)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숫자가 커질수록 뇌는 반응을 멈춘다고 해요. 고통을 자꾸 마주하게 되면 죄책감이 들지만 동시에 지치게 되는 상태 말이죠.


의료진, 구호 활동가, 사회복지사들에게서 먼저 발견된 현상으로 ‘공감 피로’(compassion fatigue)라는 것도 있죠. 감정이 고갈되는 상태, 한계에 도달한 상태요.


비행기 기내에서 응급 시에 산소마스크가 떨어지면 자신이 먼저 착용하고, 그다음 옆 사람을 돕도록 하는 것처럼, 내가 쓰러지면 아무도 도울 수 없는 그것, 공감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어요.


정말 내가 가진 그릇의 크기와 깊이는 유한하기만 할까, 그래서 어려운 것이 공감이라면 그 유한함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그러다, 마라톤으로 루게릭 병원을 세운 기부 천사 가수 션을 떠올려 보게 되었죠.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이른 새벽부터 달리기를 마치고 기진맥진한 기안 84는 션에게 물어요. “행복하세요?”라고요. 행복하니까 하는 거라는 션의 대답은 인간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 실천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어요. 더구나 그의 딸과 아들이 아빠가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를 생각해, 자신이 대신 이어가겠다고 마라톤을 하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진정한 공감이겠구나 싶었죠.


내 안에서 공감이 퍼져나가는 것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당장 내 주변 사람들의 표정에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공감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봐요.


‘나’와 ‘너’의 마음을 지키며, 인간답게 공감하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거기에도 정답은 없겠지요. 하지만 공감이 결국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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