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ㅃㅉㅇㅇ ㅅㅅ / 뽀짝이의 식사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엔 늘 강아지가 있었어요. 그러다 지인의 부탁으로, 태어난 지 한 달 조금 넘은 새끼 고양이를 받아 기르게 되었죠. 손바닥만 한 크기에 아직 제대로 걷는 것조차 어색한 작은 생명, 고양이는 강아지와 다른 세계였어요. 그리고 고양이가 성묘가 될 때 즈음이었어요. 나는 내 몸속에 숨어 있던 알레르기의 존재를 알게 되었죠. 눈이 간지럽고, 콧물과 재채기가 나오고, 피부가 따갑게 간지러웠어요. 이사를 계기로 고양이와는 나는 이별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그 후론 집에서 동물을 볼 수 없었죠.
그렇게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실내 동물원에 가게 되었어요. 강아지와 고양이를 길러 본 경험이 익숙해서였을까요? 알레르기 증상이 어느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저 보고 싶고 만지고 싶었어요. 따뜻한 체온, 살아 움직이는 작은 숨결이 그리웠어요.
실내 동물원은 카페 형태로도 많이 생겨나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려서 큰 기대 없이 갔는데, 그곳은 기대 이상이었어요.
페럿의 날렵한 몸놀림, 기니피그의 보들보들한 털, 처음 마주하고 만져 본 친칠라, 큰 눈이 매력적인 슈가글라이더, 내 품에서 여린 숨을 뱉으며 잠만 자던 새끼 사막여우, 오랜만에 만난 고양이, 내 주머니를 털려고 난리였던 미어캣 등 직접 만지고 교감할 수 있는 동물들이 다양했고, 무엇보다 직원들이 곁에 붙어서 동물을 대하는 방법을 세심하게 알려주었어요.
“이렇게 쓰다듬어주세요.”
“여기는 예민하니까 피해 주세요.”
“손을 천천히 내밀어서 냄새를 먼저 맡게 해 주세요.”
공룡이 살던 시대를 느끼게 하는 파충류는 정말 여전히 신기했어요. 특히 비바리움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유리 속 작은 생태계 안에서 살아가는 그 작고 귀여운 도마뱀은 정말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그 경험 이후 파충류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얼마 후, 열한 살 조카로부터 레오파드 게코(Leopard gecko) 도마뱀, '귀염뽀짝이'를 소개받게 되었어요. 정작 그의 엄마는 만지기조차 두려워하며 거리를 두기 바빴는데, 무척 반기고 만지고 싶어 하는 나는 조카에게도 즐거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신이 난 조카는 “뽀짝이 밥 줘야 해요!”라며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 사이 뽀짝이는 내 손등 위에서 조금씩 작고 예민한 몸을 움직이고 있었죠. 미세하게 전해지는 발가락의 느낌, 천천히 움직이는 피부의 감촉이 신비로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카가 누런색을 띤 반죽을 아주 작은 그릇에 담아 가져왔어요.
“그게 밥이야?”
“네! 아직 애기라서, 이렇게 줘요.”
나중에 들으니, 살아있는 귀뚜라미를 직접 먹이기엔 뽀짝이가 너무 어리기도 해서, 파우더 형태로 된 것을 반죽해 먹인다고 했어요. 한참 작은 뽀짝이가 먹이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언젠가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먹던 초코맛 셰이크가 떠올랐어요. 맛도 괜찮고 필요한 영양소도 충분했죠. 하지만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어요. 얼마 되지 않아 셰이크는 어쩌다 먹는 간식처럼 되어 버렸죠.
눈꺼풀을 사랑스럽게 움직이며, 말도 안 되게 너무 작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먹이를 먹고 있는 뽀짝이를 보며 문득 생각하게 되었어요.
뽀짝이에게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죠.
사막의 바위틈에서 태어났다면, 이 작은 도마뱀은 어둠 속을 지나가는 곤충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재빠르게 사냥했을 했겠죠. 살아서 꿈틀대며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것, 그 저항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이것이 ‘먹는다’는 행위의 본래 모습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뽀짝이는 유리 상자 안에서, 조카가 정성스레 갠 누런 반죽을 혀로 핥아먹고 있었죠. 귀뚜라미의 형체와 움직임이나 저항도 없는 그저 영양소만 남은 가루를 먹으며, 사냥의 흔적이 지워진 식사를 하는 거죠. 불현듯 나도 이렇게 먹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종종 샌드위치나 주스를 사 먹으면서 그 식재료가 어떻게 생겨나고 자랐는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저 유통기한과 칼로리, 그리고 그 재료의 식감이나 맛을 주로 생각했어요. 배달 앱으로 시키는 윤기 나는 치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 색색의 초밥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알 필요 없이, 그저 먹고 싶은 것을 고르고 결제하고 기다리면 되는 일, 이것이 요즘 시대의 자연스러운 먹는 방식이라고만 생각했어요.
도시에서는 더 이상 사냥하지 않고 흙을 만지지 않고, 씨앗을 심거나 물을 주거나 거두지 않죠. 포장된 것을 뜯고 데우고 씹어 삼키는 것이 익숙하죠. 과정이 지워진 먹는 행위를 한다고 생각되었어요.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자연을 동경하죠. 작은 텃밭을 나눠서 일굴 수 있게 하기도 하고요. 20대, 30대의 젊은 사람들이 ‘식집사’라고 해서, 집안에서 식물과 채소를 키우는 것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말이에요.
어쩌면 이것이 인간이 자연과 직접 관계 맺고 싶은 욕구, 어떤 사냥 본능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언젠가부터 밭일을 하기 시작하신 부모님의 식탁 위에는 직접 키워 정성이 담긴 식재료들로 가득 채워졌어요. 어머니의 손맛도 좋았지만, 그것들이 가진 본래의 맛은 내가 평소에 먹는 것들과 비교할 수 없었죠. 싱싱하고 선명한 자연 본래의 식감과 맛이요. 가끔 나는 부모님의 밭에서 그것들이 자라는 과정을 봐요. 흙과 냄새와 촉감, 그리고 나의 땀방울을 느껴요. 뿌듯하게 밭을 보여주시는 부모님을 뵈면서, 이런 과정이 어떤 의미일지 자연스레 느끼게 되었어요.
물론 식탁 위에 고기와 생선은 마트에서 사야 하는 것들이었죠. 어디선가 ‘죽음의 외주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공장에서 도축하고 가공 공장에서 손질한 것을 식당에서 사 먹거나 집에서 요리해 먹죠. 부모님은 그것을 고르는 데에도 꽤 신경을 쓰셨어요. 나의 경우엔 건강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평소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저 결과물만 소비하면 되는 일이 되었죠.
그렇게 먹는 행위는 생명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소비 행위로 변해갔어요. 이것이 가져올 내 몸의 어떤 불균형을 예상치 못하고 말이죠.
언젠가 동료로부터 영양제를 선물로 받은 적이 있어요. 식사로는 채울 수 없는 영양이 있다며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요. 사실 건강기능식품이나 알약 형태의 영양제는 간편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챙겨 먹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졌어요. 자작(咀嚼)을 선호하기도 해서 씹을 수 있는 과일로 직접 영양을 섭취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MZ세대인 어린 동료들은 자신이 먹는 영양제의 기능, 그리고 식전 또는 식후, 어느 나이에 언제 어떻게 먹을지에 대한 섭취방법도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에 비해 식사는 다이어트라는 명목으로 관심이 조금 적어 보였죠.
밥 먹을 여유도 없이 바쁠 때, 나는 종종 SF영화처럼, 맛과 영양이 풍부한 알약 하나로 영양 섭취가 충분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어요. 물론 그런 세상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여전해요. 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한들 사람의 몸은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역사상 가장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죠. 그런데 동시에, 음식과 단절된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먹는다는 것은 땅, 물, 햇빛, 계절, 생명이라는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이었을 텐데요. 음식을 통해 어떤 자연의 리듬을 느끼죠. 하지만 제철이라는 개념이 사라졌어요. 온실과 냉동 기술이 계절의 경계를 허물었어요. 계절을 먹는다는 감각. 땅의 맛을 느낀다는 경험. 그것이 희미해지고 있음을 느껴요.
어린 뽀짝이는 자신이 귀뚜라미 파우더를 먹고 있다는 걸 알까요? 야생의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까요? 어쩌면 느끼지 못할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유리 상자 안에서 자랐고, 반죽된 먹이만 먹어왔으니까요. 그것이 당연한 줄 알 거예요.
가끔, 음식을 먹어도 배는 부르지만 공허함을 느낀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또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 하게 되었죠. 혹시 이것이 단순한 배고픔이 아니라, 마음의 결핍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영양소를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었다면, 생명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그 순환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였다면, 공허함이란 단순히 ‘손수 만든 음식’이 아니라, 먹는 행위를 통해 느끼던 연결감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며칠 전, 집 현관 앞에 무게감이 느껴지는 상자가 배달되어 있었어요. 부모님께서 밭에서 직접 키우고 수확하신 붉은 꿀고구마와 단감이었어요. 튼실한 고구마를 씻어 찜기에 돌렸어요.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올 때 즈음, 냉장고를 열어 사과를 꺼내 씻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고구마는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하고요. 30년 뒤엔 사과밭이 사라질 수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먹고 소비하는 것이 우리 삶, 터전과도 연결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의 기쁨으로 찾아 읽게 된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먹는 것의 의미에 대해 또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게 했어요. 먹는 행위가 단순한 식습관을 넘어, 개인의 존재 방식과 사회적 억압의 문제까지, 세상과 연결된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그렇다면, 먹는 방식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안 될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편의점은 여전히 24시간 열려있을 것이고, 배달 앱은 더 빨라질 것이고, 가공식품은 더 정교해질 것이니 말이죠. 이런 시스템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개인의 인식은 바꿀 수 있지는 않을까 싶기도 해요.
적어도, 무엇을 먹는지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게 있지 않을까요?
“먹는 방식이 지구를 바꾼다.”
“무엇을 먹느냐가 곧 누구인가를 말해준다.”
흔히들 하는 말처럼, 먹는 것은 단순한 생존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선택이고 세계는 환경 부담을 줄이기 위한 지속가능한 먹거리를 고민하고 있다고 해요. 결국 내가 무엇을 입에 넣는가는 내 건강을 만들고, 나아가 지구의 미래를 만든다고 말이죠.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처럼, 먹는다는 것은 결국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매일 새로 확인하는 일.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고 나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작고도 온전한 존재 방식일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