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촌으로 많이 알려진 사직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은 내가 이후로 겪은 어떤 인간관계와도 사뭇 다른 그리운 시절이며, 마음속으로만 동경하는 사회적 실험이 얼마간은 실현된 기간이었던 것 같다.
우선 내가 살던 동네를 소개해 보겠다. 동네 어귀에 파출소가 있었다. 그 길을 따라올라 오면 국회의원 집이라 불리던 집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경비아저씨가 드나드는 차를 위해 커다란 문을 여닫곤 했다. 왼쪽으로는 길을 사이에 두고 굉장히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적산가옥이 있었다. 집이 좋았는지 가끔 영화 촬영지로 사용되었다. 번쩍거리는 반사판과 영화 기기를 든 사람들이 그 집 아래 모여 웅성거리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축대를 끼고 열네 계단을 오르면 바로 앞에 빨간 벽돌담을 친 집이 있었다. 그 집 안채까지 들어가려면 몇 개의 중문을 지나야 했는데 각 중문마다 잘 가꾼 정원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 집에 사는 안과의사가 낙도를 돌며 봉사활동을 하는 존경할 만한 분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빨간 벽돌집의 긴 담 끝에 우리 집이 있었다. 우리 집부터 집 크기가 작아지면서 고만고만한 개량 한옥이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열 지어 있었다.
우리 집에서 축대를 끼고 되짚어 내려가다 보면 꽤 큰 공터가 있었다. 공터 한쪽으로 건축자재가 높이 쌓여 있었고 다른 쪽은 무허가 판잣집이 산재해 있었다. 공터를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면 비탈에 기대어 천막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공터 입구에 시멘트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 뒤 판잣집에 옥례가 살았다. 옥례는 나보다 두 살이나 많고 키도 훨씬 컸지만 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옥례의 아빠를 본 기억은 없다. 옥례의 엄마는 공장에서 일했고 오빠는 – 친오빠는 아니었던 것 같다 – 뻥튀기 장사를 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모이면 다방구나 술래잡기를 했는데, 제일 인기 있는 놀이는 총싸움이었다. 총은 우리가 공급했다. 우리 옆집에 사셨던 이모부는 직업군인이셨다. 솜씨가 좋은 이모부는 시간이 나면 맵시 있는 장난감 총을 만들어 주셨다. 70년대 산업역군이었던 삼촌도 외국 출장을 다녀오는 길엔 장난감 총을 한 보따리씩 사다 주셨다. 우리 집엔 이렇게 온 동네 아이들이 쓰고도 남을 여러 종류의 총들이 박스에 담겨 있었다. 나와 남동생, 옥례와 공터 아이들, 앞집 태호, 은행 집 아이, 국회의원 집 아이들 등이 모이면, 많을 때는 열 명도 넘었다. 우리는 두 편으로 나누어 땀을 뻘뻘 흘리며 총싸움을 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녀야지, 입으로 푱푱 총소리 내야지, 가끔 쓰러져 줘야지, 정말 액션이 넘치는 놀이였다. 다른 쪽의 대장은 자주 바뀌었지만, 우리 편의 대장은 늘 나였다. 우리가 전투에 임할 때면 옥례는 나를 으레 ‘대장’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전우애는 사뭇 진지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동네에서 총싸움을 하다 인왕산까지 올라가게 되었을 때다. 인왕산은 청와대에서 가까워 대부분 입산 금지였고 군인 경비초소가 군데군데 있었는데, 다른 편 아이들을 잡으려고 매복하다가 우리가 진짜 군인들한테 걸린 것이다. 우리는 군인들의 “손들엇!” 하는 소리에 기겁하고 나가떨어졌다. 동네 아이들인 줄 알게 된 군인 아저씨들은 우리를 초소로 초대해 뭔가 먹을 것을 주었는데, 너무 놀라서 그걸 먹었는지는 기억나진 않는다. 총싸움을 시작하면 깜깜해져서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사직동에서 다양한 계층의 친구들과 어울렸다는 걸 알 뿐, 그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자신의 환경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과 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때리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말다툼을 할 때는 있었는데, 각자의 경제 사정이나 부모의 직업 등이 말다툼이 해결되는 방향을 결정하거나 일고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이 일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 한 것 같았다. 그저 목소리 큰 놈이 이겼다.
누가 뭐래도 가장 친한 친구는 옥례였다. 추석날 나는 할머니가 사주신 꽃분홍치마에 색동 깃이 달린 노란 저고리를 입고 옥례네 집에 갔다. 전날 한복 입고 춘향이처럼 그네를 타자고 약속한 터였다. 춘추 한복을 입은 나와는 달리 옥례는 연두색 여름 한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게다가 키가 자라 치마와 소매 밖으로 팔과 다리가 쑥 나와 있었다. 옥례가 추울까 봐 살짝 걱정했지만 본인이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사직공원으로 갔다. 이른 추석 아침, 누가 있을 리 없다. 우리 둘은 그네에 올라 신나게 발을 굴렀다. 힘이 센 옥례가 저만큼 나갔을 때 옥례의 치마 뒤에 쟁반만 한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보았다. 나는 그네를 세우고 옥례에게 치마 뒤에 구멍이 났다는 걸 알려줬다. 그 치마를 돌려보고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떻게 이걸 못 보았냐고 묻는 내게, 옥례는 치마 입는 시늉을 해 보이며 이렇게 입는데 어떻게 볼 수 있냐고 되물었다. 그네를 더 타고 배가 고파질 때쯤 집으로 갔다.
옥례네 집은 방 한가운데 있는 난로가 난방의 전부였다. 아마 그 치마도 그 난로에 태워 먹은 모양이다. 판잣집 안에는 전기 연결이 안되어 있었는지 천장 앞을 비닐로 덧대어서 그리로 햇볕이 들어오게 했다. 한 번은 옥례가 아파서 학교도 못 가고 나와 놀지도 못할 때가 있었다. 옥례네 집은 아픈 사람이 스스로 돌보는 암묵이 있는 것 마냥 누워 있는 옥례를 두고 엄마는 공장 가고 오빠는 뻥튀기를 팔러 갔다. 물론 옥례네가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하지 않았지만 난 뭔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엌에 들어가 뭘 해 본 적이 없었다. 망연자실 부엌에 들어서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면서도 일하는 언니나 할머니한테 부탁하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달걀부침을 하기로 했다. 달걀 두 개를 부쳐서 꿀을 넉넉히 두르고 (?) 깨와 소금과 후추를 뿌린 다음, 누가 볼세라 옥례네 집으로 달렸다. 옥례는 맛있게 먹고 고맙다는 말 대신 씨익 웃어 보였다. 그게 고마웠다. 어린 마음에도 두 개의 달걀부침으로 분위기 썰렁해질까 봐 걱정했었던 것 같다. 옥례가 다시 멀쩡해져 이불을 박차고 나온 이후 우리는 여전히 총싸움하고 사직공원에 그네 타러 가고 땅따먹기를 하며 지냈다.
초등학교 4학년 말 나는 사직동을 떠났다. 옥례와 나는 편지를 하기로 했지만 한두 번 하고 끊어졌다. 옥례는 어떻게 되었을까. 옥례도 내가 궁금할까. 다만 우리가 지금은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지만, 그때 그 시절 옥례는 위풍당당한 나의 베프였고, 나는 그녀의 신뢰를 받는 대장이었다는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