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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앙 May 18. 2024

기억 속의 여름

너의 여름은 어떠니?


H의 이야기

 아침 산책 길의 플레이리스트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온 건 우연이다. 나의 여름은 이제 막을 내렸고, 땀은 다 식었다. '일 년 전 오늘'에 뜬 사진 속 나는 웃으며 레몬을 썰고 있다. 우리는 펜션에서 수영하고 숯불에 고기도 구워 먹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조금 취했고,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고, 우린 취했다. 서늘한 가을 바람이 콧등을 스쳤다. 작년의 9월 5일.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탓에 여행지에서 가을옷을 사 입었는데, 일 년이 지난 오늘 첫 가을옷을 꺼내 입었다. 신기한 우연이다. 아침에 들었던 노래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잘 지내 요즘 말이 좀 없어졌어 여전히 하루는 버겁고 내일이 오면 또 달라질까 하는 생각에 난 또 하루를 견뎌-


C의 이야기

 그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나를 버렸다. 매미가 귓등에 앉은 것 같던 빽빽한 여름 낮, 다대포 해수욕장에 갔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식당들은 텅 비어있었다. 아침에 그가 선물해 준 휴대형 선풍기를 손에 쥐고 횟집에 들어갔다. 밥을 먹는 동안 우리는 조금 싸웠고, 기분이 상한 채로 가게를 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남아있던 감정들로 말다툼이 오고 갔다. 후덥지근한 차에 올라타자 휴대형 선풍기가 손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헐레벌떡 식당으로 돌아갔지만 선풍기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나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발걸음은 무겁고 손은 가벼운 채로 차에 탔다. 내 모습을 본 그는 울화통이 터지다 못해 폭발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내려!!!!!!!!” 그는 다대포의 한 공영주차장에 나를 버렸다.

 그 당시 다대포에는 지하철이 생기기 전이었고, 나는 부산 지리에 어두웠다. 도로변으로 걷다 보니 눈앞에 빨간색의 이층 버스가 서있었다. 목적지에는 ‘생태 공원’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집 근처에 생태공원이 있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냉큼 올라탔다. 교통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풀려 눈물이 났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닦는데 버스가 출발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알록달록한 할머니들이 앉아계셨다. 단체 관광 중이신 듯했다. 그제야 버스비로 만 원이 빠져나갔고, 내가 탄 이층버스가 관광버스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할머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부산 곳곳의 관광명소를 돌고 돌아 두 시간 만에 생태 공원 앞에 내려졌다. 생태 공원이 이렇게 길고 넓은 줄 알았더라면, 버스비가 만원일 줄 알았더라면 그냥 택시를 탈 걸 그랬다. 구글맵을 켜보니 집까지 걸어서 한시간 반이 걸렸다. 눈물을 닦는 데에 삼십분을 쓰느라 두시간이 걸려 집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까지 매미도 나와 함께 울고 있었다. 

 몇 년이 흘러 그는 무더운 여름에 나와 동갑인 여자와 결혼했고, 그를 꼭 닮은 못생긴 딸도 낳았다. 소문으로는 신혼여행지에서 임신한 아내를 버려두고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내도 타지에서 휴대형 선풍기를 잃어버렸던 걸까? 


S의 이야기

나는 지하철역 출구 계단에 앉아 울고 있다. 집과 학교만큼 자주 오게 되어 버린 사당역. 부채질을 하며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이곳에 이렇게까지 자주 올 줄은 몰랐는데. 나의 첫 연애가 삼년 만에 막을 내리고 있다. 찾지 않아도 늘 나타나던 네가, 이제는 불러도 보이지 않아 깜깜하다. 목을 가다듬고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등을 돌리고 자는 거, 어때?” “꿈에서도 보고싶지 않은가 본데.”


J의 이야기


 대학교 여름 방학 기간이었다. 중국어 회화 능력 향상을 위해 공항 면세점의 의류매장에서 2달간 근무했다. 양향이라는 이름의 중국인 직원과 함께 근무했는데, 양향은 한국어가 서툴렀고 나는 중국어가 서툴렀다. 우리는 서로 언어 습득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어줬다. 점심시간은 교대로 가졌다. 양향이 점심 밥을 먹으러 간 사이에 A항공사 기장 유니폼을 입은 J가 다가와 사이즈가 있느냐고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능숙해진 판매용 중국어로 응대하는 중에, 같은 유니폼의 다른 기장이 다가왔다. “옷 사게?” “응. 2장 사면 1장을 더 준대.” 나는 당황했다. “한국인이세요?” J는 내 말을 복사하듯 똑같이 말했다. “한국인이세요?” 서로가 중국인인 줄 알았던 헤프닝 속에서 우린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웃었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J는 비행이 있을 때마다 면세점에 들러 간식을 챙겨주었다. 기내승무원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J가 기장실에서 촬영한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내줄 때마다 그가 무척이나 대단해 보였다. 승객의 창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것이 선망의 감정인지 사랑의 감정인지 혼란스러워질 때쯤, 인스타그램에 ‘SKYJ000’라는 이름의 아이디가 친구 추천 목록에 떴다. 냉우동을 먹다가 아무 생각 없이 눌렀는데, J의 가족사진이 떴다. 아내는 임신중이었고 태명이 동동이었다.우동은 남겨졌고 J는 내 차단 목록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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