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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앙 Jun 05. 2023

'곱지 못한 마음의 하늘에 조용한 저녁이 내리기를'

책방 운영 칼럼 중

 올 초 흥행했던 ‘더 글로리’ 속 주인공 연진이는 하루하루가 너무 고단할 때 이면지에 사직서를 휘갈겨 국장님에게 던진다. 그럴만한 깡도 돈도 국장님도 없던 나는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슬픈 영화를 보고 펑펑 울거나, 하루 종일 이불속에 숨어있기도 했다. 유흥을 즐기며 우울한 기분을 재정비하거나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것에 돈을 쓰며 소위 말하는 ‘금융치료’를 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슬픈 영화를 보고 이불속에 들어가면 슬픔이 두 배가 된 채로 누워있는 사람이 된다. 유흥은 다음 날의 나를 더 고단하게 만들었고, 금융치료는 남의 돈을 쓰는 게 아닌 이상 예쁜 쓰레기와 가벼워진 통장만 남았다.


 그렇다면 뒤탈 없는 안전한 치료제는 도대체 무엇일까. 책을 추천하기 위한 서론이 너무 길었을까요?    

 우리의 기분은 갖가지 이유로 나쁘고, 아무 이유 없이도 나쁠 수 있다.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빠질 때는 이미 수십 번은 읽어 외우다시피 한 책 중 하나를 꺼내 든다. 내 책장에서 가장 손때가 묻은 책은 ‘<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이다. 나의 우울함을 달래 준 지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책의 상태는 고서처럼 너덜너덜하다. 10년이면 강산은 변하고, 나의 책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다. <낙하하는 저녁>은 분명 어두운 이야기임에도 일본 특유의 감성을 담은 분위기와 청아한 등장인물의 묘사, 담담하고 먹먹한 문체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매력이 있다. 책의 본문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은 ‘곱지 못한 마음의 하늘에 조용한 저녁이 내리기를’이라는 작가의 말이다.   


 최근에 자주 꺼내 읽은 책은 ‘<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 신미경’이다. 여기서 ‘최소 취향’이란 ‘내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최소한의 규모로 만든 일상’을 의미하는데, 읽을 때마다 몸속이 해독되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해가 잘 드는 곳에서 건강한 한 끼를 먹고 작은 것으로도 평안한 하루를 채우는 저자의 생활을 보며, 나도 한 번 따라 해 볼 만큼 부지런하지는 못해서 자주 읽으며 기분만 낸다.

신미경 작가의 전작인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도 같은 맥락으로 건강한 삶을 위한 긍정적인 영향을 얻을 수 있으니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다.   


 나의 하루가 물에 젖은 종이처럼 울어서 펴지지도 않고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 날에는, 다른 세상에 퐁당 빠질 수 있는 SF 소설도 좋다. 책은 가만히 누워서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도 될 수 있다. 올해 가장 많이 추천한 SF소설로는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제노사이드>가 있다. 특히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책장을 덮고 나면 ‘좋음, 좋음, 좋음’의 상태가 된다. 온 우주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부모의 원수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제노사이드>는 한 번 책을 펼치면 도무지 중간에 덮기가 힘들다. 필자는 <제노사이드>에 깊게 몰입한 나머지 끼니를 잊기도 했다(강아지 밥은 제때 줬다). 단, 초반에 흥미를 못 느낀다면 계속 읽어도 재미가 없을 수 있다. 호불호가 갈리는 책이거니와 페이지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꾸역꾸역 읽다 보면 일명 ‘책태기’에 빠질 수도 있다.

 베스트셀러이건 스테디셀러이건 나와 안 맞는 책을 억지로 완독 할 필요는 없더라. 경험상 그 시간에 더 재밌는 책을 한 권 더 읽는 게 훨씬 이롭다.  

 

 국내 소설로는 <긴긴밤>과 <밝은 밤>을 추천한다. 우연히도 두 제목 다 ‘밤’이 들어가는데,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되도록 집에서 읽는 편이 좋다.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라면 나처럼 별안간 카페에서 오열하는 사람이 되어 부끄러움을 사지 않기를 바란다.

 <긴긴밤>은 청소년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책이다. 혹자는 이 책을 청소년 문학이 아닌 ‘성인 위로 도서’로 지정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 또한 이 주장에 십분 동의한다.  


 책방을 운영하면서 어떻게 하면 손님의 마음에 쏙 드는 책을 꺼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블라인드 북’을 만들어 팔고 있다. 나누고 싶은 문장이 담긴 책한 권을 포장한 뒤, 그 문장을 책갈피에 적어 앞부분에 붙인다. 손님이 마음에 드는 책갈피가 붙은책을 골라 구매하는 방식이다.

 누군가의 취향과 상황에 딱 맞는 책을 찾아내는 게 쉽지가 않으니, 역으로 책이 하는 말 중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손님이 스스로 고르는 것이다. 한 문장이 마음에 들어 구매한 책은 다시 읽게 될 때 다른 문장이 마음속에 들어와 앉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분, ‘블라인드북’은 ‘아랑책방’ 스마트 스토어에서도 구매가 가능합니다.  


 거창한 교훈이 담긴 책이 아니더라도, 주인공의 말 한마디 혹은 작가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살아갈 이유를 찾아 주기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문장은 긴 시간 동안 내 곁에 머물면서 나를 쓰다듬어 줬다.

아무래도 나에게 가장 큰 위로는 역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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