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밀고 간 자리
상추를 헹구다 말고 뒤로 펄쩍 물러났다. 달팽이라니! 다른 무엇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저 독보적 형상. 며칠 전 달팽이 수십 마리가 등장하는 글만 읽고도 몸서리 쳤던 내 앞에 달팽이가 나타난 것이다.
집에는 사자와 호랑이도 구분 못하는 네 살배기와 나 뿐이었다. 예전 신혼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왔을 때처럼 남편이 올 때까지 밖에 나가있을 수도 없다. 달팽이를 바퀴벌레와 동급으로 치부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어쨌든 상추가 유기농인 것만은 확실해졌으니까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 다시 싱크대에 다가섰다.
달팽이가 느린 건 대자연 속에 있을 때다. 개구리가 뛰고 잠자리가 날 때에나 달팽이더러 느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부엌 개수대에서 겁 많은 인간과 마주했을 때는 결코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녀석은 타고난 동물적 감각과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동작으로 벌써 저만큼이나 이동해 있었다. 제멋대로 펼쳤다 오므리는 뿔과 몸통의 미끌거림이 내 볼에 닿기라도 한 듯 소름 끼쳤다. 인간보다 먼저 지구에 살아온 모든 생명체 선배들을 존중하지만, 굳이 한 집에서 살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닌가.
저 딱딱한 등껍질이라면 만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장난감처럼 집어 들고 냅다 달려 아파트 풀숲에 두고 오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녀석이 뭘 먹고 있었다. 수박 하얀 속살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작은 이빨로, 어쩌면 아삭아삭 소리도 날 것 같았다. 먹고 있는 애를 어떻게 덜렁 내보내겠는가.
주춤주춤 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이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굴러가기 마련이다.
마침 투명한 일회용기가 있었다. 안에 있던 샐러드 채소를 큰 접시에 옮겨 담고 뚜껑에 구멍을 여러 개 뚫었다. 상추 세 장 깔고, 방울토마토 두 알 넣고 녀석을 옮겼다. 그리고 싱크대를 박박 닦고 있으니 큰애가 학원에서 돌아왔다. 아이는 새 식구를 반겼다. 그보다도 엄마가 질색팔색 하면서 일을 이만큼이나 벌여놓은 걸 우스워했다. 둘째는 몇 번 이름을 부르더니 손 끝에 통이 닿자 무섭다며 밀치고 갔다. 사실 둘 다 나만큼이나 동물을 무서워해서 강아지나 콩벌레를 만나면 넋을 놓고 바라보기는 해도 만지지는 못한다. 이 녀석 관리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얘기다.
흙을 두껍게 깔아줘야 된단다. 계란 껍질도 먹이고 과일은 조심하란다. 주위를 청결히 하고 수분이 마르지 않도록, 너무 덥지 않도록 신경 쓰란다. 생명 하나 들이기로 마음 먹었으면 그 생명이 우리집 아닌 다른 환경에서 누릴 수도 있었던 안전과 행복이 이제는 내 숙제가 된다. 이런 묵직한 책임감 때문에 살아있는 것 대하기가 참 어렵고도 설렌다.
외할머니가 엄마 집에 와 계신다. 원래는 막내외삼촌 내외가 식당을 운영하면서 안가 주택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지낸다. 그러다 일년에 한 두 번 여행을 간다든지 하여 장녀인 우리 엄마가 모셔 오기기도 하고 차남 집에 가 계시기도 한다. 다 아파트인지라 계시던 곳처럼 편치 않으실 거다. 무엇보다 바깥 외출이 어렵다. 걷기가 불편하고 어지러워 하시니 지팡이 짚고 살살 노인회관에나 들르던 걸음으로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요양차 외가에서 반년 지낸 적이 있다. 도심 속이지만 외할아버지가 생전 가꾸시던 동백이나 연못, 마당 같은 게 있어 시골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외갓집 정취이라는 게 장독간이나 돌담길에서만 오는 것이랴. 우리 똥깡아지, 하며 엉덩이 투닥거려주는 할머니가 계셔서 푸근한 것이겠지.
그때 내 궁둥이는 거의 외증조할머니 것이었다. 나나 엄마한테는 한없이 좋은 할머니지만, 며느리한테는 호랑이 같은 시모인 탓에 외할머니는 주로 부엌에 가계시면서 나에게는 애정표현도 편히 못하셨다. 이렇다 할 추억이 없는 게 사실인데, 그렇다고 할머니의 그 후덕한 허리에 매달리는 것까지 싫다는 말은 아니다. 연두부처럼 하얗고 말캉한 팔뚝은 하루 종일이라도 만질 수 있겠지만 할머니는 이제 귀가 어둡고 기억이 온전치 않고 까무룩 까무룩 잠이 드신다. 나 역시도 온종일 할머니 옆에 부비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그저 애들더러 자꾸 다가가 안아드리라 한다. 할머니 이마 만져봐, 할머니 손 잡아봐, 가서 할머니 발등 한 번 문질러봐, 한다. 살포시 앉은 아기 손이 할머니 잠을 깨우지는 못하지만 그 살들이 서로를 기억하는 건 잠결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파와 밥상, 침대와 화장실을 할머니는 느릿느릿 오간다. 바닥에 앉아 엉덩이를 끌거나 엉금엉금 기어서 간다. 할머니가 밀고 간 자리에 달팽이 점액처럼 냄새가 남는다. 묵은 밥 냄새 같기도 하고, 찐 양배추 냄새 같기도 하다. 아무 것도 해치지 못하는 연체동물처럼, 순하고 고요하게 할머니는 이내 옅어질 흔적만 남기고 다시 본가로 돌아가셨다.
부축을 받고 선 할머니의 키가 그토록 커서 나는 조금 놀랐고, 허무했고, 서글펐다. 저 훤한 몸을 온전히 휘둘러본 적은 없었을 터였다. 둔한 며느리였고, 연약한 아내였고, 조금은 무심한 엄마였던 그녀는 평생을 나지막이 살았다. 이제 성긴 기억에 본성마저 잊을 법한데 할머니는 증손주 재롱에도 그저 입만 벌려 웃는다. 단지 평화로운 풍경의 일부가 되려는 걸까.
달팽이는 껍질 속에 들어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도망칠 데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참이나 녀석을 찾는다. 유기농 상추도 얼마 먹지 않았다.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는 플라스틱 통 안에서 밥 때를 가늠할 수 없는 지도 모르겠다. 뿔로 된 쌍칼을 휘두르며 싱크대를 누비던 와우장군은 이제 몸을 낮추고 또르르 말린 까만 똥만 눈다.
풀숲으로 보내줘야겠다. 마침 비가 온다. (2019.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