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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r 31. 2021

일단, 탈고

그러니까 일단은


모든 글은 과거로부터 온다. 모든 글은 이미 예전에 쓰여진 것이다. 일년 전 작가의 손을 떠나 편집실과 인쇄소, 서점을 거쳐 내게로 온 책에서부터 어제 쓴 칼럼, 방금 받은 문자메시지까지 모두 과거로부터 전송되었다. 현재의 글이란 그저 작자의 머리 속에 들어 있거나 펜 끝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내면의 사고와 아직 조우 중인 기호를 우리는 글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타인이 읽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쓰고 덮은 글을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 고친다. 중간에 손 씻고 물 마시고 침대에 누워 이불 끌어당기는 시간만이 흘렀을 뿐이다. 그 사이 글은 이미 옛 글이 되어 있다. 생각이란 멈춰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옛 글에 담긴 옛 주제와 옛 표현이 현재 관점과는 미묘하게 달라 보인다. 모자라 보인다. 아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어차피 아침에 일어나 다시 지우고 다시 바꾸고 다시 결어를 궁리하게 될 것이다. 탈고와 퇴고가 바특하게 서로를 견제하는 긴장감.


그래도 탈고는 기쁘다. 그래서 탈고는 기쁘다. 내일 또는 몇 시간 뒤 나는 과거의 글을 들고 현재의 독자와 맞닥뜨리겠지만, 마치 철 지난 옷을 입고 철 지난 유머로 운을 떼고 이미 정답이 밝혀진 수수께끼를 묻는 꼴로 내 글을 읽게 되겠지만, 탈고하니 좋다. 기승전결을 갖춘 전문 하나를 완성하여 좋다.


달리기에 가속도가 붙어 마치 발이 허공에 잠시 뜨는 듯한 그 순간이 탈고다. 뜨겁게 달군 물이 마침내 기포를 복닥대며 끓어오르다 수증기를 피워내는 순간이 탈고다. 혼자 흥얼거리던 노래가 청중을 갖춘 무대에서 마이크를 통해 그럴 듯하게 퍼져나가는 그 순간. 지독한 뒤채임을 겪고 변증법적 합일을 이룬, 새로운 상태, 새로운 물질로의 도약. 결코 헛되지 않은 귀중한 결과지만 그것은 다시 하나의 과정으로, 반론의 씨앗으로 변할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잠든 사이, 누군가 내 글을 읽은 사이, 시간이 흐른 사이에 옛 글은 새 의견에 맞서 다시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더 이상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다는 명작의 탈고는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아마도 문장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사상이 완벽히 집대성되었기 때문이리라.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이상향을 정립했기에 가능하리라. 어제의 말과 내일의 말이 일관된 확고한 가치관을 갖지 않고서는 제아무리 문법에 도통한 자라 하더라도 고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신성한 종이에 새겨 성전 깊숙이 보관된 법령도 흰 개미에 의해 먹어 치워지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돌에 새겼다는 십계명은 도대체 얼마나 자신 있게 엄정하다는 것일까.


나의 글은 돌에 새길 수 없다. 나의 글은 흘러가는 말이나 생각을 주워담아 겨우 맞춤법이나 바로잡은 것이다. 나의 가치관은 이제 막 커가는 아이들에게 신길만한 운동화 같아서 두어 계절 후에는 사이즈가 꽉 끼어 스스로를 아프고 불편하게 한다. 사명과도 같은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오지랖으로 온갖 길을 밟고 오르고 뛰고 하여 두어 계절 전부터도 헤지기 시작한다. 값지고 견고한 것을 사 신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의 글은 그렇게 패스트 패션을 걸치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실밥이 튀어나오고 목덜미가 늘어나고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달 예비단추도 없다. 그런 옷이라도 처음 차려 입고 나선 날의 자긍심, 그 뿌듯한 만족감. 그것이 탈고의 기쁨이다. 내일 다시 후줄근해질지라도 오늘 일단 문단을 이어 붙여 위 아래를 갖춰 입은 차림새로 집 밖을 나설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늘 그렇게 위안하며 잠자리에 든다.


혼잣말 같고 최면 같은 위로를 하며 잠들어도 꿈 속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모양인지 늘 시끄러운 꿈을 꾼다. 맹약, 맹세, 조약 같은 유의어들이 뒤엉켜 최종 선택을 재촉하기도 하고, 모두 빠져나간 시험장에서 백지를 메우지 못한 채 앉아 있기도 한다. 아무리 달려도 발이 늪에 빠지듯 속도가 나질 않고, 친한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 고함 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속 시끄러운 짓을 왜 계속 하냐고 묻는 사람은 다행히 한 사람도 없었다. 아이 사진을 자주 찍어주고 인화해 보관하는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친정 집으로부터 내 어릴 적 사진 앨범을 넘겨받았다. 부모님은 본인들 어릴 때 앨범마저 처분하셨다 했다. 엄마는 이제 여행을 가도 사진을 찍어오지 않는다. 박물관 입장권이나 안내서도 챙겨오지 않는다. 중요한 건 현재이고 뷰파인더가 아닌 눈과 몸, 오감으로 지금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서. 그리고 그 사진첩들이 현재의 생활공간을 차지하는 짐, 종국엔 쓰레기가 되는 것이 싫어서.


그러나 내 처지는 좀 다르다. 나는 열심히 아이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고, 어버이날 받은 카드를 보관하고, 천진난만한 그림들을 추려 파일 북에 끼워둔다. 그리고 자주 그것들을 들추어본다. 페이지를 넘길 수록 아이 글씨가 반듯해지고 그림이 정돈돼 간다. 앞선 페이지들을 차곡차곡 밟고 아이가 더 어엿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하다. 내가 탈고한 글들도 그렇게 파일에 꽂혀 있다. 야금야금 내일로 건너가고 있는지 아닌지, 적어도 나는 내 눈으로 살펴볼 수 있다. 나의 성장앨범.


오늘도 이렇게 겨우 글 한 편 끼워 넣을 수 있겠다. 충분히 기쁘다.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며 유동적인 과거의 글들을 징검다리 삼아 내일로 건너갈 수 있어 기쁘다. 돌멩이 사이가 촘촘할수록 좀더 편하게 발 디딜 수 있으리라. 조금 작아도 허술해도 괜찮다. 과거로부터 온 징표들을 통해 앞으로의 여정을 수정해 나가면 되니까.


그러므로 여기까지. 일단, 탈고.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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