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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Apr 05. 2021

목련 꽃받침

꽃이 도도할 수 있도록


목련이 부풀어간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서 주먹만한 꽃송이가 덩어리째 돋아나 과감하게 몸피를 키운다. 저 크고 목작한 송이가 어쩜 저렇게 꼿꼿이 고개를 치켜 세울 수 있는지, 나는 지치지도 않고 매번 감탄한다.


무릇 무게를 가진 땅 위의 만물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진데, 어찌하여 작지도 가볍지도 않은 몸을 저 가녀린 가지 끝에 사뿐히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일까. 속이 텅 빈 풍선 마냥, 아래에서 불어 오르는 기류에 올라탄 마냥, 이따금 굵은 바람에 낭창거리기는 해도 무게를 못 견뎌 고개를 숙이거나 납작 엎드리는 법은 없다. 도도하거나 철이 없거나 흥에 겨워서 불가사의한 힘이라도 발휘하는 걸까. 콧물에 열까지 나서 거실 바닥을 뒹굴거리던 아이가 놀이터에서는 쾌속 질주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동백꽃만 해도 도톰한 나뭇잎들이 꽃받침 바로 아래 두어 장씩 있어서 꽃송이를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실한 초록 무더기 위에 빨간 꽃덩이들이 서로를 간수하며 어우러져 있다. 그러다 다들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 퉤, 뱉어내듯 꽃을 떨궈 버리긴 해도 그 전까지는 감탄과 벌레를 호객하는 얼굴 마담을 잘 보필하는 것이다.


하지만 목련을 보라. 그저 꽃 뿐이다. 잎도 한 장 없이 그저 자기들끼리 콧대를 한껏 올리고 섰다. 햇살 아래 도도하기도 하고, 바람 속에 대책 없기도 하다. 필시 신나서 그럴 것이다. 냉랭한 동장군의 가압류에서 벗어난 것이 기쁘고 들떠서 초록 양말 한 장 꿰 신지 않고 뛰쳐나온 모양이다.


들뜨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 문예지가 주는 작품상을 받기로 한 데다 아이 없이 나만 참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봤자 기차로 왕복 대여섯시간, 하루 안에 볼일만 마치고 오는 일정이지만 엄마가 된 후 혼자 하는 첫 나들이다. 첫 데이트에는 모름지기 새 옷이 필요한 법. 나는 막판 기세가 등등한 찬바람을 뚫고 쇼핑을 했다.


이렇게 차르르 떨어지는 자켓이라니. 게다가 연한 베이지색이라니. 아기를 안고 다니면서는 엄두도 못 내볼 옷이다. 커다란 기저귀가방과 어울리지 않고, 편하고 따뜻한 것과도 거리가 먼 것이 나의 선택 기준이었다. 안에는 이보다 더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쓰임새없이 그저 앙증맞기만 한 핸드백을 들어야지. 운동화도 신지 않고 머리를 치렁치렁 풀어 헤치리라. 한없이 불편하고 춥고 아름답게. 그런 점에서 이번 외출은 성공적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기까지 얼마나 떨었는지 모르니.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감고 집에 와보니 친정엄마가 둘째를 재운 뒤였다. 남편은 차려 먹은 저녁상을 치우고 있었고, 친정아버지와 큰애가 시시한 말장난을 나누었다. 훤한 거실 불빛 속에 정겹고 편안한 것들이 펼쳐져 있다. 미역국 냄새가 실린 따스한 공기가 차가운 볼을 어루만졌다. 종일 구두에 갇혀 지냈던 발가락 사이, 허리 벨트를 푼 자리, 머리카락 정신 사납던 귓등에도 그 뜨듯한 것이 스며들었다. 이것이, 이들이 내가 이른 봄 옷을 입고 떠날 수 있게 해준 것들이다. 단상에 올라 꽃다발과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도록, 걱정없이 그저 들뜰 수 있도록, 또 마음 편히 글 쓸 수 있도록 나를 꽃봉오리로 밀어 올려준 이들이다. 적당히 낡은 잠옷 바람에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그들은 내게 고생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저 한껏 즐기다 왔는데도 그들은 날더러 고생했다고들 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고맙다고 소리내 말했던가? 그랬다면 그건 내가 적당히 낡은 잠옷으로 갈아입기 전이었던가, 후였던가?


다시 목련 얘기를 하자면, 목련의 꽃받침은 거칠고 딱딱한 나뭇가지 같은 생김을 하고 있다. 다른 꽃들의 받침은 꽃의 일부 같은 모양, 그러니까 여리고 푸른 잎사귀 모양인데 말이다. 마치 촛대처럼 단단한 목련 꽃받침 위에 송이가 꽂혀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파리들의 건사 없이도 저 도톰한 꽃덩이가 폼 나게 오똑 서 있을 수 있는가 보다. 양초처럼 매끈한 봄 자켓을 걸치고 반짝반짝 주목받을 수 있도록 내 선 자리를 안정감 있게 잡아주는 가족처럼 말이다.


며칠 새 아름다운 것들이 온통 낙화해 거리엔 청소 꺼리가 늘었다. 벚꽃 분분하던 달맞이 고갯길 차량 정체가 풀렸고, 사람들은 세일을 맞아 옷 사러 가기 바쁘다. 나는 부시시한 차림으로 아침마다 두 딸의 머리를 빗긴다. 오늘은 양갈래로, 내일은 반머리로, 땋고 틀어 올리고 반짝이는 인조머리칼을 붙이고 핀을 꽂아주며 오늘 하루 꽃처럼 밝고 아름답게 지내기를 바란다. 내가 너희들의 든든한 꽃받침이 되어줄 시간.(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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