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런아란 Apr 12. 2021

할매펜트하우스

금정산 고당봉


'정화수' 같은 거라 생각했다. 삿된 것이 들어갈 수 없는 엄중함이 부드럽게 일렁이는. 아니면 손주 먹이려고 식혀둔 수정과 같은 것. 또는 땀 흘려 찾아온 손님에게 주저 없이 건네는 보리차 한 잔. 이런 게 보통 우리가 할머니 집을 찾았을 때 만나는 것들이다. 정한 마음과 가지런한 몸놀림, 넉넉한 품새와 베푸는데 기꺼운 성정. 나의 외증조모가 그랬고, 머릿장에서 꺼내주시던 바람사탕이 그랬고, 지금도 떠올리면 코 끝부터 매워지는 할머니의 집, 할머니의 품이란 그런 거니까.


금정산 꼭대기 '할매집'이라는 이름의 고당姑當봉에 있다는 금샘은 분명, 정갈한 마음 한 그릇, 인심 한 대접이요, 한평생 넘쳐나는 모정의 샘이리라 짐작했다. 범어사부터 출발해 해발 800미터 정상에 올라 속세에 조갈 난 마음을 어리광부리며 달래고 와야지 나선 길이었다.


두 손 두 발로 돌계단을 더듬어야 했다. 다 와 간다는 하산객들의 입 발린 격려를 이어 붙여 겨우 한 고개씩 넘었다. 할매 얘기에 내가 괜히 마음을 푸근하게 먹었구나 싶었다. 종국엔 밧줄까지 붙잡고 매달려서야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무릎이 시큰하도록 아찔하게 디딤돌을 밟으니 마침내 금샘이 보인다.


오목한 삼각 웅덩이. 두 개의 나팔관과 질을 꼭지점으로 한 자궁처럼 생겼다. 그 가운데 평생 마르지 않는다는 샘물. 내 눈에는 황금빛 싱글몰트로 보인다. 맥아만을 발효하여 오크통에서 숙성시켜 깊고도 똑 부러진 맛이 나는 고급 위스키. 전체 시장에서 단 5%만 존재하는 스카치위스키의 아이덴티티.


하긴. 이곳 할매가 어디 보통 할매인가. 고봉준령을 다스리는 산신이다. 발치에서 독경을 헤아리고 손끝으로 천기를 가늠하는 분. 내 자식 안위 정도를 걱정하는 여염집 아낙의 정화수처럼 보이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할매집 봉우리는 시시한 잡배들이 범접 못할 도도한 꼭대기였고, 아래는 있어도 위는 없는 펜트하우스였다. 360도 파노라마 전경이 압도적인 최고층에는 아직 세상사 이치를 짐작 못한 애송이들은 오르지 못할 위용이 있다. 할매는 무른 것들이 드나들기 좋게 길을 펼쳐놓지도 않았고, 집 한 켠을 내어 곰살맞은 쉼터를 마련하지도 않았다. 험준함을 온몸으로 받아낸 이들에게만 잠깐 비스듬히 있을 수 있는 현관을 허락할 뿐이었다. 그런 한정 없는 가파름과 패턴 없는 난해함을 고독하게 이겨낸 자들에게 베푸는 축배이리라. 그토록 크고 생명력 있는 잔에 담긴 그것은.


할머니들의 음전한 정성을 자연스럽게 수혜하던, 염치없던 시절이 끝나간다. 인내와 중용을 인격의 아름다운 종착지로 여기던 전체주의적 가치관과 함께 말이다. 그간 남성보다 여성 쪽에게 더 무거웠던 관습적 멍에는 이제 갓 할머니가 된 어머니들과 머잖아 할머니가 될 엄마들에 의해 조금씩 합당함을 찾아가고 있다. 육아 관련 강연마다 엄마의 행복이 아이의 자존감과 정비례한다고들 한다. 엄마 스스로 만족하는 인생을 살아야 아이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고귀한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자란다는 자부심이 아이에게 심어지는 것이다. 엄마 생을 관통하는 뜨거운 열정이 아이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할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자손을 위한 기도만을 해야 한단 법은 없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필라테스 회원권을 끊고 중국어를 배우고 적금을 깨서 해외여행을 할 때인지 모른다. 모든 것의 우선 순위이던 내조, 육아, 살림이 마무리되지만 피부양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사회다. 여자로 태어나 고된 준비 끝에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 기른 영예를 스스로 치하하길. 나 자신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을 이기적이거나 나잇값 못하는 것처럼 느끼지 않길. 어차피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야 폐경을 맞거나 치매가 온다 하여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뼈와 살이 기억하는 온기, 만겁의 연으로 얽힌 그 정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억지로 끊어낼 수가 없다. 애초에 자궁이란 무언가 살려내기 합당한 곳이지 사라지게 하는 데는 무능하다. 아이를 배어 나았든 품어 길렀든 모정이란 한 번 새겨지면 지워지기 어렵다.


그런 할머니가 최고층 펜트하우스에서 도도하게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찌 흉일 수 있겠는가. 아들 사업자금을 대주지 않고, 막내딸 혼수를 늘여주지 않고 당신 안위에 투자하는 것이 비난 받을 일이겠는가. 귀한 싱글몰트 한 잔을 음미하고 덥혀진 심장으로 꿈을 쫓는 할매의 자존감을 누가 감히 알맞지 않다고 할 것인가. 이것은 여자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이자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가 삶을 끝까지 귀하게 대접해야 할 의무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나도 그런 할매가 되리라. 아이를 기르고, 그 아이의 아이가 자라도록 내 책상을 버려두지 않으리라. 부엌을 키우고 공부방을 넓히더라도 내 노트북, 내 꿈 놓을 자리를 줄이진 않으리라. 찬장에는 손주가 좋아할 주전부리가 가득하고, 달력에는 아이들 만날 날이 공들여 표시돼 있으며, 소파에는 꼬맹이들 낙서 가실 날이 없겠지만, 글을 쓰는 시간과 공간만은 오롯이 내 것으로 지키며 즐길 것이다. 금정산 산신 할매 같은 위용을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다.


아내이자 어미로서 일희일비가 남편에게 달리고, 아이에게 달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희' 하는 것이야 두루 좋다지만 '비' 하는 날엔 속절없이 무참하다. 득도하지 않는 한 아마 죽을 때까지 뒤채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면 거친 돌바다를 헤집고 할매 펜트하우스에 올라야지. 할매가 건넨 금빛 싱글몰트로 호사하며 가슴 뜨겁게 돌아와야지. 마르지 않는 잔이 길들여지지 않는 길 끝에 늘 그렇게 있을 것이므로.

작가의 이전글 목련 꽃받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