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을 기다림

by 이런아란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이상의 단편 <실화>의 서두.

제목만큼이나 자전에 가까운 이 소설에서 화자는 비밀스럽고 복잡한 인간들의 숲에서 홀로 남루하여 굶주리고 고통받는 것에 통탄한다. 사실 그는 따로 비밀이 필요 없을 만큼 자신만의 기호를 음유하는 작가면서! 그가 공들여 설명한 추상에 대해 나는 정독을 하고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난해하다는 독자 항의로 절반 밖에 연재되지 못한 그의 시 <오감도>는 반이나 비밀 속에 묻힌 것이나 다름없고, 드러난 반마저도 마치 음어처럼 들린다. 그랬던 그조차도 사람에겐 비밀이 있어야 함을 이토록 절실하게 이야기했다.


같은 맥락으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무엘 베케트는 인간이 생을 통해 가져야 할 것은 기다림이라고 했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극중 시대적 배경도, 서사도, 심지어 고도도 없다. 기거에는 인간의 대표, 또는 인간의 기초 단위라 부를 수 있는 숨 쉬고 귀 들리고 말할 줄 아는 인간과 겨우 먹고 겨우 자는, 날것 그대로의 삶만 있을 뿐이다. 인간이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 곧 기다림이요, 그것 없이는 인간과 삶이 한 무대에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다못해 자살을 하려 해도 목을 맬 튼튼한 밧줄을 기다려야 하고, 그것을 찾으러 나설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질 않는가.

때로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이 부조리극의 창작자 역시 "나는 고도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만약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서 밝혔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고백에 엉큼한 의도 같은 건 숨어있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로 뭘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희망하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이 너무 조악하고 유치하여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품위 없고 이기적인 바람이라 남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마저 속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의식 너머의 세계에 비밀이 묻혀있다 해도 좋으리라. 즉 기다림과 비밀은 모두 본능적으로 나를 살리고 보호하는 항체다. 나를 절망이나 파멸로부터 지켜주는 면역력이자 꽉 막힌 현실에서 달아나게 해줄 위조 여권이다. 그 여권을 평생 써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은밀한 금고 속에 그것이 준비돼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안도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버텨낼 수 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호주머니 하나 없는 옷을 걸친 것과 같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허기질 때 먹을 사탕 한 알 둘 곳이 없는 사람이다. 몹시도 고독할 때 전화 한 통 걸 수 있을 만한 동전 하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기다리는 것이 없고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기쁨조차 그 자리에서 휘발돼 버리고 말아 다른 날을 위해 남겨두지 못한다. 다가올 궂은 날을 위해 겸허를 담아둘 곳은 더더욱 없다. 깨달음은 누적되지 않으며 남겨둘 영광 같은 것은 없다. 한 순간, 한 감정, 한 사건들은 즉각적으로 소진될 따름이며 그에 대한 아쉬움마저도 없는 사람이다.


악의적이거나 운명적인 사정에 의해 모든 주머니가 제거된 단벌 신세의 누군가라 하더라도 그는 입안에라도 무언가 담아두려 할 것이다. 주위 소리를 못 듣는 한이 있더라도 귓구멍 안에라도 뭔가 채우려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간절하게,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기다림 자체에 몰두할 것이다. 숨쉬는 것이 불편할지언정 비어있는 콧구멍 속마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또는 당연히도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온몸의 구멍이 막힌 염한 시체일 뿐이다. 또는 살아도 감흥 없이 생을 소진해나가는 자다. 만일 후자라면 그의 무의식 속 더듬어지지 않는 비밀처럼 자신이 기다리는 무언가가 파묻혀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봐야 할 것이다. 유무형의 억압, 본능적 방어기제, 거세된 희망 등의 이유로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고,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자신만이 겨우 풀만한 추상을 한 가득 쌓아 두고서도 비밀이 없는 것을 비관했던 작가처럼, 또는 스스로 창조하고도 그 구체를 드러내 보이지 못해 난감해했던 또 다른 이처럼.


나 역시 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을 입고도 모자라 자궁 안에 커다란 기다림을 담아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 내가 만날 신인류도 아기주머니를 가진 딸이라고 한다. 기다릴 것도, 기다려야 할 날들도 많은 어미가 될 운명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면서 기다리고, 모르면서 기다리고, 기꺼이 기다리고, 힘겹게 기다릴지 헤아릴 수 없다. 혹시라도 그런 일들이 문득 진절머리 나게 느껴지는 날이 오더라도 생은 기다림이라도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것 없이는 일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기다리다와 기대하다는 두 말꼴이 닮은 것이 그저 우연이 아닌 듯도 싶고.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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