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 납득의 삼각관계

김연수,「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감상

by 호압사저포기
꿈과 나무, 그리고 농담

소설의 표현대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면, 내가 여자친구에게 이 소설을 추천해준 이유는 인사동의 꿀타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여자친구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이 소설을 읽을 당시 나는 인사동에 오래 전 친구와 꿀타래를 먹으러 간 길이었다. 인사동으로 나가는 길에 우리는 우연히도 정독 도서관을 지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정말 우연히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알다시피 소설은 정독도서관 근방을 배경으로 한다. '정독도서관' 근방을 배경으로 하면서 '우연'을 소재로 다룬 소설. '우연'히 '정독도서관'의 야외 벤치에서 이 소설을 읽었던 순간의 햇볕과 잎사귀가 아직도 눈 앞을 어른거리는 것 같다.




이 소설은 어렵다. 김연수가 소설 속에 제시한 삶의 구불구불한 행로를 따라가다보면 금세 길을 잃는다. 소설을 처음 읽었던 그때도 난 길을 잃었다. 책을 덮으니 옆에 있던 그 친구가 물었다. 소설이 어떤 내용이었냐고.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냥 얼버무렸다. 야, 이거 그냥 달콤한 소설이야. 꿀타래 같아. 꿀타래 먹은 벙어리처럼 그렇게.


이 소설은 '우연'과 '필연',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납득'의 삼각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김연수는 이 삼각 관계에 박지원의 지구의, 남자와 여자의 농담, 그리고 그들 행로의 종착역인 육백년된 노송이라는 세 가지 옷을 덧씌운다. 자세히 보자.


첫째, 박지원의 지구의. 작가는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과정을 서술하기 위해 역사를 끌어들인다. 역사책에는 농담이 존재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만이 서술될 뿐이다. 1780년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 그리고 그 뒤로 무르익은 실학 사상이 뇌관이 되어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진짜 그럴까? 갑신정변이 일어난 이유는 알 수 없다. 1874년 박규수가 꺼낸 박지원의 지구의 때문일 수도, 박규수의 지구의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지구의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모두 우연의 연쇄고리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듯, 역사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만, 역사이고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납득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둘째, 남자와 여자의 농담.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 뿐 아니라 남자와 지도 가게 주인, 카페 가게 주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에게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소통은 일방향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를 '농담'이라 규정한다. 소설 속 '농담'과 '진담'의 관계는 '우연'과 '필연'의 관계와 같다. '그녀의 꿈' 얘기 부분에서 보이듯이 '농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녀가 헤어진 그와 사랑을 나눴다는 이야기는 '우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의 '농담'에 대고 인과 관계를 찾는, 즉 '여자가 남자에게 아직 마음이 있어서 꿈을 꿨다'라든지의 질문은 아주 무의미한 것이다. 그들은 애초에 소통할 수 없는 '농담'의 관계, 그리고 '우연'에 의해 만난 관계였으므로.


셋째, 그들 행로의 종착역인 백송. 남자가 지적도를 펼치면서 그들의 행로를 따라가는 일은 '농담'으로 이루어진 소통과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일과 같다. 애초에 그들의 '농담'은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고, 사건의 인과관계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남자가 행로를 찾지 못하고 길을 헤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백송'의 존재다. 그들의 행로는 육백년된 소나무를 중심에 두고 빙글빙글 돌아간다. '백송'의 육백년의 삶은 원고지 두 매로 정리된다. '백송'을 둘러싼 갑신정변 등의 역사적 우연의 결합도 결국 육백년이 지나면 원고지 두 매가 된다. 다시 말해, 백송은 자신을 둘러싼 '우연'의 결합체를 '필연'으로 '납득'한 존재다. 시간이 육백년이나 흘러버렸으니까.


결국, 그날 '백송'을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아간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로는 '납득'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관한 '납득'인가? 그것은 '우리가 왜 헤어져야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납득이다. 남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당장은 찾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이유이고, 모든 것이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엔 답을 찾아야 한다. 역사라는 것이 '농담'이 허락되지 않는 인과적 '필연'의 연속체이듯이, '우연'의 결합체인 우리 삶도 결국엔 '필연'이라는 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래야 다음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므로.


하지만 '납득'의 과정은 쉽지 않다. 소설이 '백송'과 남자가 대결하는 장면에서 끝나는 장면이 이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제목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이라는 것도 이 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왜 '농담'은 '쉽게' 끝나지 않는가? '납득'이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연인과의 이별이라거나, 친구와의 다툼 속에서 '이 일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물론 삶의 진실은 '우연'에 가까워 답을 찾기 힘들지만, 우리는 '필연'의 답을 달고 다음 단계로 향해야 한다. 그 속에서 아프고, 헤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만, 자신만의 납득 과정 이후에는 다음의 삶이 존재한다. 물론 우연 속에서.


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어쩌면 이렇게 중언부언한 감상평보다 내가 오래전 그 친구에게 한 '꿀타래 같은 소설이야'라는 감상평이 더 정확한게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꿀타래는 언뜻 보기에 실 같다. 아무렴 실 같이 생겼다고 하나하나 다 풀어서 헤쳐 먹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손 치더라도 손은 끈적끈적, 실은 엉망으로 엉킬테다. 소설도 마찬가지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생이라는 거, 하나하나 인과 관계를 나열할 수 없으니까, 그냥 꿀떡 삼키라고, 그렇게 납득하라고 말이다. 물론 실타래와는 다르게 아주 쓰디 쓰겠지만.


여자친구에게 이 책선물을 해줬다.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나도 그때 그렇게 힘들어봤으니까, 이제는 너에게 그러지 않겠다고. 다시 말해 꿀타래로부터 이 책 선물까지의 인과 관계.


[2018. 03. 06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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