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김연수,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 관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

by 호압사저포기
김연수,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소설의 공간은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한 도시이다. 물론 성재가 이미 성수의 결혼이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한 것이라 결론내리고 있으므로,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재의 눈길을 끌었던 검은 새 두 마리가 사실은 실패 감는 노인에게 묶인 가짜 새였던 것처럼, 또한 해림(海林)이 사실은 바다가 보이지 않는 도시인 것처럼, 성수가 이 곳에 결혼을 위해 온 것도 애초에 부자연스럽고도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수의 눈에는 이 도시가 어떻게 보이는가? 성수에게 이곳은 '개가 사람을 타는 곳'이다. 소설 말미에 서술자가 마치 '개가 사람에 묶인 것처럼' 성수가 성재에게 끌려간다고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 '개가 사람을 타는 도시'는 공간적 배경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시선으로 볼 때, 개는 사람을 태워야 하고, 사람은 개를 타야 한다. 그러나 이 도시는 사람이 개를 태우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물건처럼 팔리는 곳이 이 도시이다. '영업용 차'인 아우디에는 '영업 대상'인 여자가 타고 온다. 이 공간에서 '여자'를 보증하는, '여자'의 아버지라 자신을 설명하는 '남자'의 말은 잘 빠진 물건을 파는 영업사원의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언뜻 보아(자세히 보더라도), 사람이 팔리는 일이 자연스럽게 보인다('영업용 차'가 '아우디'이지 않은가).


이 도시에서 '개가 사람을 타듯이', '성수가 성재를 맥없이 따라 가듯이', 이미 정해진 운명은 거역할 수 없다. 영업 대상인 여자 역시 그렇다. 여자는 성수가 아니더라도 아우디에 실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닐 것이고, 어딘가 하나쯤 나사 빠진 사람들을 위해 소모될 것이고, 아니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기 삶에 닥친 가난이라는 거대한 비극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장애를 가진 성수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성격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을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사로 확대된다.



삶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즉 돌이킬 수 없어 너저분해질 대로 너저분해진 삶을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왜 사는가? 소설은 간단명료하게 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 소피아 교당은 쓰레기 하치장이 되기도 했다. 성수와 성재가 머무는 게스트하우스는 보기에 따라 여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송화강은 국경 너머로 아무르강이 되어 흐른다. 노교수의 공룡 전시회 역시 동춘서커스단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수는 결혼 후에 다른 삶을 살 수 없다. 여자도 목동 아파트에 살더라도 매혼이라는 삶의 거대한 비극을 피할 수 없다. 굳이 실존이라는 말을 달지 않더라도,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 관계 속에서 매듭지어지는 것이다. 굳이 '살아야 하는 이유'라 덧붙인 것은 성수의 '죽고 싶다'는 말 때문이다. 성수가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말과 이어지지만, 이는 불가능한 결론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달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물론, 누구도 '이렇게 사는 게 좋아서' 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운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운명'은 '필연'과 어울릴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는 '우연'과 더 친하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농담」에서 '갑신정변'이 우연에 의해 일어났듯,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서 '이토의 암살'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 일어난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를 쏘지 않았더라도, 우덕순이 채가구에서 이토를 쐈을 것이므로 '이토의 암살'이라는 사건은 막을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토의 암살'의 주인공은 굳이 '안중근'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므로 이 역사는 우연의 산물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우연 중의 우연'인 것이 때로는 '운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연'의 하나로 여자와 성수가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혹은 다른 여자가 그 자리에 왔더라도 운명의 결론은 비극으로 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는 이 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덕순은 이등박문을 쏘지 못했다. 그러나 이토는 그 날에 죽었다. 그날에 죽지 않았더라도 다른 '안중근'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성수는 여자와 결혼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을 했는가, 방아쇠를 당겼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결론에 쉽사리 납득할 수 없다. 자신의 운명이 우연 중의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고 해서, '납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재의 등 뒤로 '성 소피아 교당'이 '거대한 물음표'처럼 보이는 것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농담'이 '쉽게' 끝나지 않는 것도 이러한 '납득'의 어려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우덕순, KBS「시사기획 창」에서.

그런데 아주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서사 이상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우덕순은 과연 친일파인가?'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얼마 전 방영한 KBS의 「시사기획 창」에 나왔듯이, 우덕순은 학계에서 밀정의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사실이 어찌 되었는가와 관련된 '역사'의 영역을 벗어나 소설 내의 관점에서만 접근해 본다면, 결말이 조금 다르게 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의 관점대로라면, 아주 만약에 안중근이 이토를 쏘지 못하고 우덕순이 쏘았더라도, 이토는 죽었을 것이고, 이 사건은 '시대가 영웅을 지'은 것이면서, 우리 민족 전체의 독립의지를 나타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덕순이 변절자라면, 이미 결론 내려졌던 것처럼 보이는 '운명' 또한 달리 봐야 하지 않는가?


역사가 지나간 일임에도 새로 쓰이듯이, 우리 삶도 다른 삶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것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가. 삶이라는 것이 역사의 인과처럼 선명하다면, 그것이 우연의 결합으로 만들어져 막을 수 없다면, 그 무력감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자세를 조금 달리해 물음표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게 좋지 않을까. 삶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짐짓 모른 체 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눙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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