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고시원 체류기

「갑을고시원 체류기」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

by 호압사저포기

박민규, 「갑을고시원 체류기」

마취 없이 치과 진료를 하는 것은 고통이다. 신경 치료의 가장 마지막 단계인 레진을 씌울 때는 마취를 하지 않는다. 물리적 통증이 없기 때문에 마취를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오히려 치과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단계이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마취 없이 레진을 하는데 코로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입이 달달 떨리고 숨을 입으로 쉬면서 잠시만요,를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큼 치료도 길어지는 법. 나는 행복했던 순간들을 억지로 떠올려 보았다. 그 순간 내 평생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이 생각날 건 뭐람. 덕분에 호흡이 더 가빠져 치료를 잠시 그만두고 다시 했더란다.



평범하게 사는 게 자기 꿈이라는 사람을 만났었다. 적어도 그때 나는 그랬다. 꿈이라는 것도 참 유치하게 꾸는구나. '엽기적인 그녀'의 결말도 이해가지 않는다는 그녀를 나는 속으로 나무랐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여자에게 삶을 배우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앞으로도 살면서 그 여자보다 똑똑한 사람은 아마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이제 평범하게 사는 게 이제 꿈이 되어버렸으니까. 하고 싶은 일에 앞서 지난달 카드 내역을 살펴보는 게 일상인, 낭만을 이제는 소설 속에서도 찾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인생 목표가 '갑을고시원'의 결말처럼, '간신히, 간신히, 안간힘을 다해', '갑을고시원'을 탈출하는 게 되어버렸으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소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은 2018년 봄이었다. 조그만 구멍가게같은 학원에서 지루한 국어강사가 된 나는 근처 학교의 아이가 이 소설이 내신 범위에 들어간다는 말을 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작가라서가 아니라, 그 학교 선생의 용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의 첫 대답이 이랬으니까. '주석도 안 달린 소설을 어떻게 시험 문제로 낸다니?'



우리는 우리와 닮은 삶에 박수를 친다. 그니까 우리는 우리와 앞으로도 관련 없을 일들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살다 보면, 말이다',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 이야기만큼이나 황당한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난다. 나만해도 그렇다. 아니, 나부터 그렇다. 사랑하던 여자친구가 아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든지, 누나가 결혼하는데 한 푼 보태주지 못한다든지, 정규직이 되지 못해 기간제가 되어 고시촌의 원룸을 전전하게 될 것이라든지의 미래를 상상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도입부는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의 이야기를 믿으라는 선언이다.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갑을고시원에서 겪었던 '나'의 이야기는 '나'를 넘어서 '甲乙'의 이야기, 즉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공감'이라는 주제를 '공감'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쓴 소설.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고갱이는 무엇일까.


소설을 읽다보면 이상하게도 작가가 주인공을 (독자 입장에서)불친절하게 배려해놨다는 인상을 받는다. 소설 속 '나'에게 삶의 무게는 스무살 남짓한 남자가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무겁다. 집안은 망해버렸고, '방'이라기보다 '관'과 같은 곳에 '이사'라기보단 '이동'에 가까운 '운동'을 도와준 '친구'는 '나'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은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우문이다. 작가는 '나'의 감정을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쉽게 알지 못하도록 꽁꽁 숨겨 놓는다. 공감이 없는 이해는 차라리 '동정'에 가까운 것이므로, 감정에 대한 돌려말하기를 통해 주인공에 대한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관'에 처음 입주한 날 하염없이 슬퍼 울었다기보다는 '쟁쟁쟁쟁'이 명곡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으로, '똥돼지'에게 창피함을 느껴서 얼굴아 화끈해졌다기보다는 '에어컨 통풍구 곁'에 서있었기 때문이라는 표현으로 말이다. 반대로 이 짧은 소설의 삶을 이해한다면, '나'의 슬픔과 창피함, 스무살 청춘의 민낯을 들여다 보게 된다.


그런데 친구의 우문을 들은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도, 분노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외로움'이다. 하필이면 왜 '외로움'인가? 우리는 이러한 '외로움'을 이해하면서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나'가 '소리가 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과정은 외로움을 받아들이면서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그 누구도 가르쳐주거나, 훈련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당혹스럽다. '밥'은 늘 있지만 '휴지'만큼은 각자가 사서 써야 하는 갑을고시원의 규칙은 이런 점에서 세상사와 닮아 있다. 슬플 때 울거나, 밤에 자기를 혼자 위로하거나. 휴지는 개인의 가장 내밀한 감정과 함께 한다. 이 과정은 '밥'처럼 누구와 대신 나눌 수 없이 스스로 견디어 내는 것이다. 때문에 '나'가 자기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외로움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거적데기마냥 너덜너덜한 삶을 추동하는 힘도 누군가의 '나도 그래'라는 소소한 위로에서 나오지 않던가. 누구보다도 혼자 사는 것 같았던 '김검사'도 휴지가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지만, 甲乙은 그 밀실에 대고 '이하동문이다.'라고 대꾸한다. 무엇보다 1cm 두께의 베니어로 나뉜 고시원의 장관이 멀리서 보면 세포와 같다는 진술이 고시원에서 느끼는 이 외로움이 삶의 본질이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짧은 소설 속 '어쩌면 인간은 -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라는 선문답같은 구절은 이 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당혹스러우리만큼 고통스러운 외로움을 견디는 청춘에게 甲乙이 건네는 능청스러운 위로인 것이다.


'인간은 - 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라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다는 비유로 보인다. '인생'이 '고시'라면 '고시패스'는 '죽음'일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소설의 이정표는 쉬운 '죽음'보다 어려운 '삶'에 찍혀 있다. 고시원을 '간신히, 간신히, 안간힘을 다해' 탈출한 '나'가 '지금'을 '천국'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니까 소설은 어떻게 고시원을 탈출하라는 방법에 대한 자기계발서따위의 멍청한 답이 아니라, 어찌 탈출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렇게도 어려운 삶도 돌아보면 그닥 나쁘지 않을 것이라 청춘들에게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봄부터 나는 소설 속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사실 2018년 봄은 그걸 깨달은 시점일 뿐, 거지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 건 지겨울 만큼 오래되었다. 좀 엿같고 거창한 표현이지만 지금의 '삶의 고통'을 비유하자면 마취없이 치과 치료를 받는 것따위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고 생각이 든다. 이런 고통이 크기만 한 게 아니라 점점 자란다는 게 문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치과 치료도 어찌저찌 나도 모르게 끝나는 것과 같이, 소설 속 '나'의 문제가 어찌저찌 풀렸던 것과 같이, 나도 어찌저찌 내 앞에 산적한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그렇게 해년마다 목표는 똑같다.



악착같이 '갑을고시원'을 탈출해서, 미래의 누군가에게 의뭉스럽게 전하고 싶다. 그 시절을 어찌 견뎌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찌됐든 버텨왔다고.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