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관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
올해 들어서 10년 만에 만나는 친구만 몇을 만났다. 왜 하필이면 10년인고 하니 학창시절 이후에 더는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년. 확실히 이제는 이러한 시간 단위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나 싶다.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스무 살 이후에는 어쩐지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사실 할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만날 필요를 못 느껴서 시간이 그렇게나 되었다. 각자 다른 모습으로 서로 못 봤던 시간을 지나 왔지만, 만나고 나서 느껴지는 씁쓸한 뒷맛은 어쩐지 모두가 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가지고 있는 외로움에 대해서. 친구도 같은 맛으로 만남을 정리했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제목은 sf작가의 공상과학 소설이라는 책의 홍보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소설의 제목은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가?'와 같이 과학적 물음도 아니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과 같이 공상의 영역도 아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가정이 아니다. 세계의 진실, 그리고 예정된 개인의 패배. 소설은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공상과학기술의 옷을 벗겨내면 소설 속 한 인간, 노인의 외로움이 보인다. '안나'는 '슬랜포니아 행성계'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우주 정거장'에서 기다린다. 그녀의 기다림은 기약이 없다. 불가능에 가깝다. 정거장은 100년 넘게 운영되지 않았고, 더이상 우주선은 출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기다림을 지속한다. '모든 힘'에는 '안티프로저'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동면을 통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기술인 안티프로저. 그런데 이 기술은 안나와 가족을 헤어지게 만든 원인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노인은 이별이 자신 때문이라고 평생 자책하며 다시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안나'는 도대체 왜 기다리는가? 그녀 역시 자신의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안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조건절 내에 함의되어 있는 예정된 패배가 아니다. 조건절 이후의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안나'는 예정된 실패를 향해 무릎을 꿇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선다. 따라서 그녀는 불가능과 실패를 향해 고철 셔틀을 타고 달려간다.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향해서, '빛의 속도로 가더라도 수만년이' 걸린다는 망망대해의 우주를 향해서.
소설의 결말에 등장하는 노인의 웃음과 관련해서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안나'의 기다림, 그리고 항해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순례'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이지'는 '안나'의 어린 시절 1인칭 서술자이며, '항해'의 이유를 '순례' 과정과 연결 지을 수 있게 된다. '데이지'는 어린 시절 '올리브'처럼 세계의 진실을 알아가고자 하는 어린 아이이다. 세계의 진실은 궁금한 만큼이나 대가가 가혹하다. 시초지에는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에 함께 맞서야 한다는 것.
'순례' 역시 '항해'처럼 패배가 예정되어 있다. 순례자들은 시초지에 정상적으로 살기엔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이 넘는 순례자들은 그러한 시초지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온 순례자들도 고통스러운 세계의 진실을 마주했음에도 슬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예정된 고난과 괴로움 앞에서 그들은 왜 순례를 떠나는가? 그리고 왜 돌아오지 않는가?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사랑' 속에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사랑'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괴로움'은 사랑하는 자에게는 감내할 만한 고통이므로, 순례자들에게 순례 과정은 '괴로울' 것이지만, 그보다 더 많이 '행복할' 것이다. 따라서 '데이지'처럼, '안나' 역시 웃으며 예정된 실패를 향해 기약없이 달려 나간다.
이처럼 소설은 공상과학기술을 갈등의 해결책내지는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속성을 밝혀내고 있기에 단순히 공상과학 소설로 치부하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공상과학' 소재는 단순히 도구적인 소재로 쓰인 것인가? 여기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소설 속 공상과학의 상상력 속에서 인간다움의 속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워프 항법과 웜홀 항법 사이. 거대한 과학 기술 변화 사이에 있는 인간은 무력하다. 변화 이전에 있던 사람들은 잊혀지고 도태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심지어 인간의 삶으로서는 영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100년이 흘러도, 또한 뇌세포가 파괴되어도 '안나'라는 인간은 기다린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우주를 건너'가는 과정으로 치환하는 상상력 역시 오히려 사랑의 속성과 인간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과 각자 가지고 있던 외로움. 소설 속 '항해'와 '순례'는 출발은 있으나 끝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에 상처받고 눈물 흘리고 닳고 닳았다면, 이미 순례는 시작된 것이다. 한번 시작한 이상 순례는 멈출 수 없다. 따라서 다시 10년 뒤, 그 10년 뒤에 만나더라도 우리는 어딘가에 쓸쓸한 표정을 가지고 만날 것이라 생각해 본다. 물론 지금처럼 괴롭기만한 채로 만나는 건 아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