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의 제자이며 정신과의사인 에스더 하딩이 쓴 "사랑의 이해"라는 책이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여성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해 가기 위해 가부장제 사회 이전,
모계사회, 원시 공동체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결국 달 신화로까지 접근을 시도해 나간다.
일테면 남성이나 사회의 영향을 받기 이전
즉,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 이전에 여성이 여성으로서 보유하고 있는 고유한 특질과 상태를 알아내기 위해 역 추적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 가운데 처녀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언제 읽어도 가슴 뛰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보통 처녀라고 번역하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수식어로 사용되는
그리스어 단어 파르테노스(parthenos)는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의미한다"라고
제임스 프레이져 경은 설명한다.
"그리고 한 처녀가 아이를 낳으리라"는 이사야의 처녀는 단지 "젊은 여인"을 의미한다고 덧붙인다.
처녀성이라는 용어는 생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자질, 주관적 상태, 심리적 태도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 실제적인 개념은 '결혼한 여성의 맞은편'에 놓여 있다
서구의 가부장제 체계 안에서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성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속해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몇몇 원시 공동체에서는 아직까지도 젊은 여성은 결혼할 때까지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결혼할 때까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자유에 대한 원시적 개념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처녀인 한에 있어서는 즉 독신일 때 여성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녀에게 순결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도 없으며 원하지도 않는 포옹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처녀로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만 속한 독립된 존재이다. 그녀는 자기가 성관계를 가졌던 남성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본능에 따른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독립된 존재이다.
그녀는 남성에게 매여 있지 않으므로 그에게 매달리지 않으며, 그들의 관계가 영원해질 것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아직도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용어의 원초적이고 고대적인 의미에서의 처녀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주인이며 처녀이며 독립적인 존재이다.
초승달 국면에 해당하는 여신의 중요한 특징은 그녀가 처녀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녀에게 끌리는 남성을 정복하기 위해 자신의 본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헌신적인 태도로 그녀에게 보답할 단 한 명의 남성에게만 확보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본능은 한 명의 남편, 하나의 가족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되지도 않는다. 그녀는 사랑의 여신이지만 여전히 처녀이다. 그녀는 본질적으로 독립적인 존재이다. 그녀는 여성적인 형태로 남성 신들의 특징과 속성을 나타내는 남성신의 여성 복사판이 아니다.
반대로 그녀는 그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행동은 어떤 남자의 행동에 매여있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완전한 권리로서 자신의 신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존재인 처녀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녀는 남을 기쁘게 하거나 남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또는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이라 하더라도),
남들을 이기기 위해서, 남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관습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는 어쩌면 관습에 의하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쉽고 더 적당한 경우에 아니라고 말해야만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녀로서 그녀는 처녀가 아닌 다른 여성들(결혼했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로 하여금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는가를 살펴서 상황에 적응하게 만드는 눈치작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삶에 대한 태도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있는 여성,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일들을 하고, 말해야 한다고 스스로 느끼는 여성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의미에서의 처녀가 아니다.
그녀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언제나 어떤 남성의 복사판, 또는 시지그(Syzygue)로서 행동한다. 이 남성은 아버지나 남편, 또는 그녀가 매우 높이 평가하는 남성 등의 실재하는 인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에 관한 하나의 추상적인 행동이며, 또 때로는 더욱더 여성과는 상관없는 생각일 수 있다.
이를테면 남들의 마음에 들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느니 결혼을 하기 위해서 젊은 아가씨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 하는 식의 생각 말이다. 그러한 생각들은 그녀 안에 있는 남성, 그녀 자신의 아니무스의 표현이며 이 남성과의 관계는 많은 점에 있어서 결혼한 여성의 생각과 흡사하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심리 바깥에 있는 어떤 사람, 또는 사물을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처녀인 여성은 이처럼 의존적이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기분 나쁘게 여겨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관습의 권위를 부정하는 동기가 단순한 이기주의라면 치료약은 병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이루어진 시도는 그러면 퇴행적이 될 것이며 통제되고 문명화한 조건으로부터 야만성으로의 회귀가 될 것이다.
반면에 만일 그 시도가 개인적인 동기가 아니라 비개인적인 동기, 여신 에로스의 원칙과 옳은 관계를 맺기 위한 욕망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그 시도의 결과는 모든 자아중심주의 또는 이기주의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러면 여성의 행동은 향기로운 음료에 비할만한 진정함을 가지게 될 것이며 여성 자신은 자아중심주의가 아니라 보다 심오한 깊이를 가지는 인격을 나타내 보이게 될 것이다.
하딩에게 진정한 여성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인 불평등을 타파한다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그녀에게 여성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자연의 힘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이해하는 사랑의 개념이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한 남성에게 집착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개인의 내면에 숨어서 여성의 육체를 통하여 실현되는 비개인적인 에로스의 힘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가장 완벽한 자각에 이르렀을 때 가장 잘 사랑하는 자, 신의 왕림에 "예"라고 대답했던 성모 마리아가 된다.
즉, 자신 안에 숨어있는 자연의 힘을 독립적인 방법으로 자아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을 줄 아는 존재, 처녀인 것이다.
에스터 하딩 <사랑의 이해 172-173쪽>
난 사실 예수의 출생에 별 관심이 없다.
신의 아들이면 어떻고 사생아면 어떤가.
다만 그가 살아간 삶의 방식. 그가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살아왔는지가 내게는 중요하다.
또한, 마리아가 크리스마스 때나 한 번씩 등장하는 순결한 여인이든 미혼모이든 그 또한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동정녀라는 의미가 이렇게 해석될 때 마리아는 내게 아주 중요한 도전과 의미가 된다.
이러한 처녀의 정의는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나 윤리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고는 어쩌면 신의 임재를 놓쳐 버릴 수 있고 그리고 불시에 침입해 들어오는 신의 요구에 언제든 예라고 대답할 수 있기 위해서는
( 마리아가 수태고지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하듯)
먼저 처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최소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진리를 담아내기 위한 그릇으로서의 독자적 주체성과
이를 획득하기 위해서 치열한 "주변과의 끊어내기"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구도의 길을 선택한 자들이 왜 출가를 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네 집안에 원수가 있다는 예수의 말이 새로운 의미와 의무로 다가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화육인 예수를 잉태한 자다.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체현을 위해서 먼저 처녀가 되어야 한다면, 동정녀 마리아란 여자에게만 요구되는 종교적 자질은 아닐 것이다.
신을 믿고 거기 자신의 삶을 내려놓은 자들, 그래서 참으로 아버지께서 <혹은 하늘이>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다 이루었다는 예수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원하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처녀 마리아가 선행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신이 없다거나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물이라거나 또는 신을 내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가져야 할 어떤 것들을 채워 주고, 빈약한 정신세계를 대행해 주는 종교적 마스코트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별개의 문제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처녀인가?
글쎄다. 하지만 처녀가 되어가는 중이라고 말하고는 싶다. 그래서 처녀 아줌마로 처녀 할머니로 나는 달큼하게 익어가고 싶다.
덧,
40대의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의 나로 살아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 준 고마운 책이다.
오늘 새벽에 마리아에 관한 말씀을 읽다가 생각이 나서 지난 글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