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
우리 마음의 본성이 흘깃 들여다 보이는 그런 때가 있다. 자연의 풍광 앞에서 행복감을 느낄 때, 가슴에 울리는 음악을 들을 때, 소리 없이 내리는 흰 눈을 바라볼 때,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산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볼 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환해진 방바닥을 내려다볼 때 광명과 평화와 지복의 순간이 우리를 찾아와 잠시 우리 곁에 머무는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이와 같은 일별 一瞥의 순간들을 충분히 이해 못 하는 것 같다. 현대 문명은 그것들을 제대로 이해할 배경이나 틀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그런 일별의 순간들을 깊이 탐색하여 그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아보도록 격려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무시하고 틀어막도록 교묘하게 또는 드러내놓고 압력을 가한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들에 경험한 바를 나누고자 할 때 아무도 진지하게 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결국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이 될 수 있는 무엇을 놓치고 만다.
자신의 '참자아'를 억압하고 그래서 자기가 진실로 누구인지를 모르게 하는, 이것이야말로 현대 문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어둡고 혼란스러운 얼굴이다.
소걀린포체 <삶과 죽음에 관한 매일묵상 76쪽>
일별 一瞥 한번 흘깃 봄. 눈을 깜짝할 새, 만큼 언뜻 본다는 뜻으로 '언뜻 볼 별"이라고도 함.
일별, 자주 쓰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단어여서 반갑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늘 그립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을 때 섬광처럼 찾아왔다 사라지기도 하고, 낮잠처럼 느긋하고 흐리멍텅할 때, 그 졸린 눈 사이로 슬며시 다가와 까딱까딱 웃어주기도 하고...
하지만 절대로 눈 부릅뜨고 찾으려 하면 찾을 수 없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는 않는 그 마법의 순간.
어느 날, 머리를 휙 스쳐 지나가는 지명 地名에 이끌려 봇짐을 싸서 아이들을 데리고 타지로 이사를 간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내가 왜 그곳을 가게 됐는지 물으면 대충 얼버무릴 뿐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냥 갑자기 머리에 떠올라서...라고 말하면 무모하고 대책 없고 무책임한 인간이 되는 것 같고 그 당시의 나의 진지함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의 시절은 좋았지만...)
그렇게도 나를 들었다 놨다 하며 소중했던 일별의 순간들이 요즘 들어 뜸하다.
왜일까?
내가 너무 세속적이거나 목표지향적이거나 긴장해 있거나 할 일이 많아 조급하거나 바쁘거나 등등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