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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셔서

by 관지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요한복음 4; 46-53)





그 거의 죽게 된 아들은 아비 덕에 살아났다. 그 거의 죽게 된 아들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열심히 죽게 된 지경 속에 머물러 있었고 어쩌면 자기가 죽을 지경에 놓인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옆에서 보기 애타고 안타까운 아비가 대신 예수님을 찾아갔다.


이'대신'이라는 것. 어쩌면 신앙의 기적은 대신의 길 위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사랑은 '대신' 속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 아비는 주님이 아들이 있는 곳으로 오셔서 직접 상태를 보고 만져주어야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자꾸 "내려오셔서..."라고 청을 넣는다.


"제 아들 좀 고쳐주세요. 내려오셔서..." 하는데

주님은 대답은 이렇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Go home. Your son lives."


백부장이 종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할 때는 오시지 말고 그냥 말씀만 해달라고 해도 부득들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더니 이 왕의 신하에게는 같이 가 주십사 해도 또 부득불 그냥 가라고 보내신다.


이유가 뭘까?

사람을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귀찮아서도 아닐 테고


지금 이곳은 주님이 처음으로 기적을 베푸신 곳이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을 보고 다들 좋아라,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때는 믿었는데 지금은.... 아닌 걸까.


나는 예전에는 기적이나 표적을 구하면 기복신앙인 것 같아서 애써 그런 것 없어도 믿는다고, 체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옳습니다 주님, 저는 제 믿음을 위해서 기사나 이적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제 삶에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또 덕분에 제 믿음이 더 좋아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이 아비처럼 어떤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내가 교회를 가야만

헌금을 내야만

기도를 해야만

봉사를 많이 해야

혹은 착하게 살아야, 등등...

이런저런 이유와 얼개들로 신앙의 한계를 정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우리의 믿음이 없어도 가능하다.


이 아비를 보면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게 아닌가 싶다. 다급해서, 아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물론 주님은 이런 상태를 간파하셨고 그래서 어쩌면 일부러 같이 내려가자는 부탁을 거절하신 것 같기도 하다. 표적과 기사라도 있어야 믿을 수 있는 우리들, 제자들 그리고 아비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 민감함과 간절함이다. 이 아비의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절실함이 자신이 설정한 조건을 깨뜨리고 무작정 예수님의 말씀대로 집으로 향했다.

The man believed the bare word Jesus spoke and headed home.


믿어서가 아니라 급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이고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그 말씀을 붙잡고 집으로 내려갔다. 그에게는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말씀하신 대로 했더니 믿을만한 일이 일어났다.


그의 진짜 자생적인 믿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점과 아들이 나은 시점이 같았다는 걸 알고 나서였다. 내려오시지 않아도 가능한 이 표적과 기사를 보고서야 그와 그의 가족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다.




나는 지금껏 네가 직접 주님을 만나야만 너의 문제가 해결되고 회복될 것이라는 이 '내려오셔서'라는 나름의 전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아니,

네가 못하면 내가 대신해 주면 된다.


내가 대신 기도해 주고

내가 대신 주님을 만나 부탁하면 된다.


그래, 너는 아플 테면 아파라.

헤맬 테면 헤매라.

내가 대신 주님을 만나고 내가 대신 기도하마.


어쩌면 그 아들 덕분에 아비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온 집이 믿게 된 것처럼

나 또한 네 덕분에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누리게 되고,

그 덕에 허약한 믿음이 좋아질지도 모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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