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는 안전에 집착하고 있다.
이런 집착은 공공정책에서
뉴욕 매디스가의 상업광고까지
의료에서 교육, 개인 및 가족의 삶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생명보험에서부터
휴대폰 분실 보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보험에 가입한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안전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는다
....
온갖 곳에서 안전에 대한 보장을 팔고 있으며
우리는 돈을 내고 그 보장을 사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장받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위험의 감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사실이 우리의 직업, 사생활, 친교,
신념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자신의 한계를 테스트해 보길 거절하거나
자신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길 꺼린다면
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로 살 수밖에 없다.
과학, 역사, 기술, 예술 부문에서 이룩된
가장 괄목할 만한 발전들은
모두가 위험의 감수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다.
벤 카슨의 <위험을 감수하라> 6쪽
손주가 생기고
그리고 세월호 이후에는 더욱
안전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
안전 제일주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뭔가 위험한 상황에 자기를 방치하는 사람을 보면
걱정보다 짜증과 화가 올라오곤 했다.
그런데 이 안전에는
자본의 교묘한 술수가 파고들어 있다.
불안하게 하고
불안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
불안을 통해 자기 이익을 노리는 세력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밥은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위험이 꼭, 전부, 무조건 안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걸음을 내딛는 것.
낫이 숫돌을 피하기만 한다면
언제까지 무딘 낫으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험?
그럼 안되지 에서
그럼 어때서...
거기 뭐가 있는지 한번 들어가 보지 뭐.
거기 뜻밖에 보물이 숨어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