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알 같은 인생

by 관지


"나 시집올 때 친정 엄니가 깨를 한 되 주더라고. 이것이 그 깨요"

작년, 가을볕에 깨 타작을 하면서 권사님이 해주신 말씀이다.

"옴마나, 족보 있는 깨네요. 시집을 몇 살에 오셨어요?"

"스무 살에 왔제. 신랑 얼굴 한번 못 보고"


그러니까 지금 연세가 여든다섯이시니 족히 60년은 넘은 깨다.

거기다 그 엄니 손에서는 또 얼마의 세월을 살다 왔을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쓰고 버리는 게 아닌

아끼고 품고 살리고 보존하는 이 생명의 역사가

한 여인의 손길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는 경이로움.


그래, 이게 인생이고 삶이지 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길고 지난한 삶, 돌아보면 고생뿐인 삶이어도 묵묵히 해마다 심고 거두며

식구들을 먹여 살려온 깨알 같은 인생이 여기 있었다.


아무리 세월이 바람 같아서 잡을 수 없다고 해도

이렇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하루,

한 해를 거듭해 살아온 여인의 손길에 생명이 깨 한 톨의 역사로

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정작 삶은 우리에게 유명해져야만,

부자가 되어야만,

혹은 꿈을 이루어야만, 이라고

조건을 달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침이면 일어나 주어진 일을 하고

그 사이사이 이웃들과 다정하게 웃음을 나누고

어둠이 내리면 잠이 드는 한 날,


굳이 이익을 따지고 의미를 셈하지 않아도

삶은 이렇게 우리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세월을 이어간다.


가끔은 궁금하다.

도대체 삶다운 삶이라는 게 뭘까.

그런 틀을 세우고 우리를 그 안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사는 게 제 맛을 잃고 힘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이쁘지 않아도, 날씬하지 않아도,

사실은 사는 데 지장이 없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별 볼 일이 없어도

삶은 그 자체로 인생이 된다.


오늘 새벽에 읽은 요한복음 9장에는 한 소경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

하는 일이라고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던 그 사람을 보며

저렇게 밖에 못 사는 것은 그 부모 죄냐, 저 인간 죄냐고

입방정을 떠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누구 잘못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그러니까 그가 소경으로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말이다.


신앙이 내가 보는 관점을 예수가 보는 시각으로 갈아타는 일이라면

이 세상의 인간은 단지 두 종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사람과

그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 내 삶이든 누구의 삶이든

언제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그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지 알 수 없으니

좀 기다려주면 어떨까.

한 낱 깨 한 톨도 까막눈으로 시집온 여인의 손에 들려 존재의 목적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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