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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처럼

by 관지

사도행전 8장 1-8절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고 장사를 지내고 사람들은 큰 슬픔에 사로잡혔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을 했고

*사람들은 사울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졌는데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했다.


그러니까 빌립은 도망자의 신분이었다.

더구나 그는 얼마 전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하고 있나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는 복음을 전한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경에는 그의 심정이 나오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궁금하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을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도망자의 신분이 되었는데

그는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빌립은 본시 어떤 사람이었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장면 하나.

예수님이 빌립에게 물으신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이 있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이처럼 빌립은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막연한 것을 싫어하고 눈에 보이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그런 빌립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버려두고 있다.

왜?

자기가 위험에 처하거나 말거나,

자기 심정이 두렵거나 슬프거나,

자기가 하고 싶다거나 하기 싫다거나에도 상관없이

또한 결과에 대한 희망이 주는 동기 유발도 없이,


그러니까

나의 의지나 염원, 감정에 상관없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

하게 된다는 것

하고 있다는 것.


우리 식으로는 성령의 주도하심이고

다른 말로는 내면의 이끌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결과는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기록한다.


스데반의 죽음이 사마리아 성의 큰 기쁨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데반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슬픔이나 실패라는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또 다른 기쁨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신비이고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세상의 관점과 관념으로는 도무지 어림할 수 없는.


내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이 빌립의 태도이다.

외부의 상황이 어떠하든

나의 본능과 습이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이,

그러거나 말거나 성령의 혹은 내면의 이끌림에 나를 맡기고 사는 것.


그것이 부럽다.

나라고 하는 육체의 겉옷을 벗고 감정의 날갯짓들을 지나

신방으로 들어가 오직 그 분과 하나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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