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자 열사람이 고침을 받는 말씀이다. (누가 17;11-19)
여기에는 세 가지 동사가 나온다.
*소리 질러
*가는 중에
*돌아와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 질렀다.
왜? 문둥병자는 마을 안에도, 사람들 가까이에도 올 수 없으니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 기도문에는 많은 능력이 숨겨져 있다.
짧지만 내가 먼저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기도이다.
어쩔 수 없는 나.
아무리 해봐도 안 되는 나.
바울의 고백처럼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
내가 나를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아는 자, 만이 할 수 있는 외침이다.
그런데 하늘이 요구하는 겸손과 겸비함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실상 이것이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열쇠다.
그리고 가는 중에.
그들은 예수님이 고쳐주지 않으셨다.
그냥 쳐다보시고는 한마디 던져주실 뿐이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라고.
그런데도 그들은 간다.
곧바로 몸을 돌이켜... 제사장에게로.
이 장면을 상상해 보건대 착해서 눈물겹다.
"와! 우리 소리를 들으셨어."
"어, 우리를 보셨어."
"우리한테 하신 말씀이잖아, 가보자 "
그들과 같은 문둥병자였고, 그들처럼 낫기를 원했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나아만 장군이 생각난다. "아니 내가 누군데... 어디 내다보지도 않고." (열왕기하 5;12)
그는 자기가 도움이 필요한 처지임에도 장군이라는 신분과 역할에 취해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하마터면 걸림이 될 뻔했다.
그러나 이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어떤 대우나 대접을 바라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말에 응답해 주시는 그 한 말씀의 소중함에 희열과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그대로 순종했다.
이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입으로만, 말로만 아니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가는 중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깨끗하게 해 주셔야만 제사장에게로 갈 수 있다고 우기며 버티고 있는가.
신앙은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는 중에 나음을 입는 것이고,
고침을 받는 것이다.
마지막, 고침을 받은 열사람 중 한 사람이 주님께 다시 되돌아왔다.
그 돌아옴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그 고침 받고 회복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감사하려고 돌아왔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신다.
나는 지금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을까.
어디에 있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주께서 하신 일에 감사하며 나의 회복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