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그친다는 처서의 절기가 다가왔다. 어제 저녁에는 아직 남아있는 여름의 기운을 마저 없애기라도 할 기세인지 비가 내렸다. 밤새 오락가락 하던 비는 새벽이 되어서야 멈추었고 우리는 산책을 나섰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침을 우리의 피부에 스밈으로 맞이하던 우리는 ‘날씨가 이제 선선하네.’ 라는 말을 자연스레 입밖에 뱉었다.
드디어 가을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한 해의 후반기. 그 시작을 알리는 절기가 처서였다.
여름 내내 뜨거운 햇빛 덕에 자라던 풀들이 처서와 함께 자라는 것을 멈춰선다. 곧 있을 명절을 두고 이 시기에 산소를 벌초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열심히 자라난 풀들에게는 다시 잘라버려 미안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의 산소를 벌초하는 행위는 살아생전 후대들이 다 보이지 못한 정성의 표현이다.
그런 정성의 표현이 나는 싫었다. 이미 떠나버린 이들에게 보여줘 봤자 알아주지도 않을 것이 너무나 분명한데. 살아남아 있는 이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벌초를 싫어했고 다시금 벌초를 하러 명절에 다시 산에 올라야 하는 상황도 싫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추장의 지역 바로 그 순창에 선산이 있었다. 말이 좋아 선산이지 아무도 다니지 않는 산이었다. 노랗게 익은 벼들이 자리잡은 논들이 선산 아래에 펼쳐졌기에 그 광경만은 봐줄만 했다. 그러나 그 뿐 각종 비료 냄새와 차 한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것 같은 좁은 시멘트 도로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데에 충분했다.
선산으로 가는 길 어느 작은 마당 같은 공간에는 다른 집안 사람들의 묘도 간간히 보였다. 산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곳에 아주 평온하게 있는 묘였다. 그런 묘를 보고 나는 문득 그 집안의 후손들이 부러웠다. 산에 오를 일도 없으니 얼마나 편할지 상상만 해도 즐거울 일이었다. 우리 집안의 선대들 보다 후대들을 아끼는 마음이 큰 것이 분명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세 사람이 줄을 지어 올랐다. 락카와 낫을 든 아빠가 앞장을 섰다. 그 뒤로 벌초 기계를 멘 작은 아빠와 주전부리들을 어깨에 맨 내가 뒤 따랐다. 그리고는 30분 정도를 오르기 시작하면 산소가 보였다. 그러나 산을 오르다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집안의 산이기도 하고 시골에 있다보니 이 산을 드나드는 이가 없었다.
산에 길이 나는 것도 자주 누군가가 다녀야 길이 나는 법이다. 그러니 매년 벌초를 위해 산소를 방문 할 때마다 얇고 작았던 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풀들은 무성해 져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느낌이었다. 이를 위해 아빠는 락카를 들고 앞장을 섰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락카를 흔들고 뿌리기를 반복했다. 고요한 산 속에는 오롯하게 우리 세사람의 낙옆 밟는 소리와 팔뚝만한 쇠통 안에 구슬이 흔들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이 락카를 흔들어 대는 광경을 내가 처음 보았던 것은 아마 초등학교 4~5학년 때 즈음이 아닌가 싶다. 그 때에는 네 사람이 이 산을 올랐었다. 지금 아빠가 차지한 락카의 자리는 할아버지가 차지했었고 벌초 기계의 자리는 아빠가 차지했었다. 그리고 작은 아빠는 작은 몸뚱이를 가진 나를 케어하는 자리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 때 할아버지가 락카를 칠하는 것을 보며 무서웠었다. 무서운 tv프로그램들을 한창 집에서 볼 때라 나무들이 노하여 우리를 가두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년을 이어온 락카칠은 세월이 갈 수록 옅어 진 것도 있고 자라난 나무와 함께 하늘과 가까워진 것들도 있었다. 해가 다르게 자라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잃은 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30분이면 보여야 할 산소가 아무리 찾아 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나무와 덩굴들에 가로막혀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막연하게 산등성을 오르는 선택을 했다. 오르는 것 외에 내리막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벌초를 안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한 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산소를 찾았다. 내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지만 앞장을 섰던 아빠와 작은 아빠의 얼굴엔 마침내 찾았다는 뿌듯함의 표정이 가득했다. 마치 수 년간 묻어 놓았던 캡슐을 찾은 듯이.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알려왔다. 나무 사이로 비추던 하얀 빛이 어느 덧 주황색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때마침 벌초를 마친 우리는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 속에서는 저녁이 더 빨리 찾아오는 법이었으니까. 내려오는 내내 아빠의 락카통을 흔드는 소리가 어두움에 스며들었다. 힘든 것도 좋은 추억이었는지 세 사람은 내려오는 동안 길을 헤매던 시간을 되짚었다.
그제야 나도 불만이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마음 속 불평으로 가득 차있던 응어리가 산밑에 다가갈 수록 녹아내렸다. 비록 억지 추억이었다 해도 부정 할 수는 없지만 추억은 추억이었다. 어쩌면 산소가 산 속에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라도 가족끼리 유대감을 쌓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수 있겠다 싶어졌다. 산 밑에 있던 가기 쉬운 산소를 가진 후손들은 겪지 못할 일이니까.
세 사람이 길을 잃었던 이야기는 여전히 명절 자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