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울랄라 Nov 13. 2020

1. 헬로 프랑스, 봉쥬 마담

2달러 지폐는 행운을 줄까

"어디 쯤이야?"


"아, 나온거야? 미안. 숙소 체크인 시간이 늦어져서 아직 한시간 정도는 더 있어야 도착할 것 같아. 어디 앉아 있을 만한 곳 있으면 좀 쉬면서 기다려줘."


며칠만에 집이 구해질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숙소라는 말을 듣는 순간, 타국에 도착했다는 현실이 조금 더 와 닿았다. 한 시간이라. 여행이었다면 잠시 공항 안팎 풍경을 구경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캐리어 4개와 배낭 하나를 실은 카트 2개,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주변의 모든 것을 신기해하는 7살 아들이 있었다. 몸도 마음도 어딘가로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은 1도 들지 않았다. 카트들까지 놓고 자리 잡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기를 한참, 마침 적당한 곳으로 이동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이고, 아직 남편 못 만났나봐요. 인사해요, 우리 딸. 이분이 엄마 아까 입국심사대까지 가는 거 도와줬어. 안 그랬으면 엄마가 반대로 갈 뻔 했거든."


"그러셨어요? 감사해요! 아이 데리고 혼자 오신거에요?"


대학원 다니는 딸의 방학에 맞춰 딸과 여행 겸 오셨다더니, 딸이 시간 맞춰 픽업을 나온 모양이다.


"아, 네. 조금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


"홀몸도 아니고 아이에 짐까지 힘들텐데 너무 늦지 않게 남편이 오면 좋겠구만... 저기 아들, 아줌마가 뭐라도 주고 싶은데 이거 밖에 없어. 미국에서는 2달러가 행운을 의미한다고도 하던데. 프랑스에서 좋은 일들 많이 생기길 응원하는 아줌마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둬."


낯선 어른이 선뜻 내민 지폐에 잠시 쭈뼛하던 아이는 고갯짓으로 보낸 나의 신호를 읽고는 "감사합니다"하고 이내 2달러를 받아들었다.


"그럼 우리는 가볼게요. 프랑스에서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아요. 고마웠어요!"


"네, 감사합니다. 좋은 휴가 보내세요."


나도 결혼 전에는 휴가때 엄마랑 여행다니곤 했는데... 문득 엄마는 딸이 있어야 외롭지 않다는 그 흔한 말이 새삼 떠올랐다.


"엄마, 나 배고파"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기내식이 잘 맞지 않아 먹는둥 마는둥 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사실 한창 입덧중인 나도 다르지 않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샌드위치, 콩을 곁들인 스파게티는 그대로 카트에 반납하고 디저트로 나온 사과랑 오렌지로 빈속만 면한 정도. 전방 100미터쯤 앞에 편의점이 보인다. 문제는 피곤한 몸뚱이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짐들인데.


머리로 되지도 않는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려는 찬라, 전화벨이 울렸다. 생소한 발신자 번호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프랑스 번호임을 눈치챘다.


"헬로우"


나의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쏟아지는 외계어 한뭉치. 이럴줄 알았으면 넷플릭스에서 프랑스 영화라도 좀 봐둘걸. 이 나라에서 사는 동안 들어야 할 외계어의 실체가 그저 놀랍고 당황스럽다는 생각에 멈칫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캔 유 스픽 잉글리쉬"로 겨우 흐름을 끊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막 이 땅에 떨어진 나에게 딱히 그리 반길 만한 전화가 올 일도 없었지만 영어로 들려오는 상대방의 이야기는 정말 예상밖이었다. 나름 꼼꼼히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아이 카싯이 왜 아직 공항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에서 돌고 있는 걸까.


내가 느낀 절망감이 전해진건지 다행히 상대방은 내 위치를 알려주면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편의점 앞 의자에서 10분 후에 보기로 한 뒤 일단 아이와 카트를 하나씩 나눠 끈 채 편의점으로 향했다.


간식거리로 아들이 먹을 요거트와 빵, 내가 먹을 과일샐러드를 골라 계산대 앞으로 갔는데 예상보다 길게 늘어선 줄. 대충 눈치를 보니 맨 앞에 계신 할머니가 자신이 사갔던 물품을 바꿔달라는지 환불해달라는지 하는 문제로 실갱이가 벌어지는 모양이다. 하필 지금 마음 급한 내 앞에서.


결국 계산대 줄에서 하염없이 발을 구르기만 하다가 공항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편의점 입구쪽에 서서 짐을 지키고 있던 아들 손에 간식들은 억지로 안겨놓고는 공항 직원에게 달려갔다.


땡큐를 다섯번쯤 하고 건네받은 카싯을 들고 돌아서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여전히 긴 계산줄과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듯 아슬하게 간식들을 들고 있는 아들, 그리고 짐 카트 2개.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나씩, 천천히 하면 된다.' 

아들을 짐 옆에 잠시 세워두고 간식들을 다시 받아든 채 계산줄에 다가섰다. 그리고 얼마 후,


"봉쥬흐, 마담"


"봉쥬..."


세상에 이렇게 어색할 수가 있나. 입밖으로 꺼낸 나의 첫 프랑스어라는 사실이 인식되는 순간 썩소같은 미소가 번져왔다. 민망함 때문인지 피곤함 때문인지 나는 편의점 직원이 건네는 간식봉지를 빼앗다시피하며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그사이 사람들이 좀 빠져나갔는지 다행히 게이트 앞 쪽 의자들 주변이 한결 한산해졌다. 아들과 일부 짐을 먼저 빈 곳에 옮겨놓고 다시 돌아가 카싯을 어깨에 들쳐맸다. 아직 6월. 거기다 8시가 다 된 저녁인데 이렇게 더울 수가 있나? 자리를 잡고 앉으니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지만 간식 봉지를 뒤적거리는 아들을 보며 이내 긴장을 다시 조였다.


"아들 프랑스에서 처음 먹는 요거트네!"


"어, 프랑스는 진짜 요거트랑 빵이 맛있어?"


"그래. 이제 바게트랑 크로와상 같은 것들 많이 먹어보자."


"좋아! 근데 엄마... 숟가락이 없는데?"


"......어..?"


아들이 요거트를 거의 다 마셔갈 때즈음, 이제 도착해서 주차를 마쳤다는 남편의 전화가 걸려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5. "프랑스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