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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랄라 Nov 13. 2020

2. 꿈도 야무지다

차떼고 포떼고 이방인 이름표 달기

덜컹대는 선풍기 따위에 물러날 더위가 아니었다. 낮에 37, 38도까지 오른 기온은 밤에도 28도 부근에 버티며 다시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 더위 속에 세 식구가 저 고물 선풍기 한대로 열흘을 버텼다.


프랑스 사람들은 더위를 느끼지 않는 특별 비법이라도 있는걸까. 길거리를 다닐 때마다 정말 사람들의 땀구멍을 유심히 바라본 적도 있다. 에어컨 없는 나라. 대단한 인내심 강자들.


며칠째 밤을 지샌 피로가 가시지 않아 눈을 겨우 뜨고 보니 체크아웃까지 앞으로 1시간. 아침먹는  포기하고 씻고 짐 챙기기만도 빠듯한 시간이다.


방 문을 열자마자 주방에서 아이스박스를 들고 나오는 남편과 마주쳤다.


"냉장고 안에 있던 것들 다 빼도 되지?"


"어, 다른 것보다 김치가 문젠데 어제 얼려놓은 얼음으로 종일 괜찮으려나 모르겠어. 아이스박스는 차 안쪽에 실어줘."


말하면서도 소용없는 짓임을 알고 있다. 차 안이든 트렁크든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서 손바닥만한 얼음은 한시간도 채 버텨내지 못할 거란 걸.


도착하자마자 김치 담궈먹을 여유가 어디 있겠느냐며 친정 엄마가 싸주신 김치는 프랑스 도착 한달 만에 3년 된 묵은지의 비주얼을 갖추게 됐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이 김치들은 또 한 번 화려한 업그레이드를 할 것이다.


남편이 일단 꾸려진 짐들부터 차에 싣는다고 짐을 들고 내려갔다. 꾸물댈 때가 아니다 싶어 한 손엔 바닥에 굴러다니던 아들의 로봇 장난감을 들고, 한 손엔 칫솔을 든 채 베란다로 가 길가를 훑어봤다.


'아, 저 차구나.'


기본 연식 20년 이상은 돼 보이는 차들 사이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하얀색 재규어 신형 SUV.


숙소 이동 때마다 짐 운반을 위해 차를 빌렸지만 오늘은 제대로 호구가 된 날이다. 대체 자율주행차가 다니는 요즘 세상에 수동차량을 고집하는 이유가 뭔지 수동 천국인 프랑스에서 오토 차량 렌트는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그 중에서도 오늘, 이 동네에서 렌트 가능한 오토차량은 오직 저 SUV 한대. 저 차를 차지하지 위해 우리는 무려 450유로, 60만원이라는 돈을 뜯겼다. 


캐리어 두개를 끌고 내려간 남편이 차에 다가서자 잠금잠치가 풀리고 잠시 후 트렁크가 부드럽게 올라간다.


'저 반짝이는 차로 어디라도 여행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씻고 입고 대략적인 사람 몰골로 탈바꿈한 뒤 지체할 시간 없이 재규어가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운전은 당신이 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차로 10여분 거리니까 트램으로 이동하면 시간은 비슷하게 걸릴 거야."


차 안을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남편이 소싯적 테트리스 좀 해본 듯한 실력으로 차 안을 짐들로 빈틈없이 채워놨다. 희한한 것이 하루가 지날수록 짐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은 계속 늘어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갖고 온 캐리어 6개와 이런 떠돌이 생활은 짐작도 못하고 한국에서부터 부지런히 날아온 우체국 택배박스 5개, 며칠전 재래시장에서 혹하는 마음에 산 꽃병과 장볼 때마다 필요한 손수레. 어쩌면 운전자 한명이 구겨앉을 만큼의 공간이 남아 있는 것이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엄마, 나 그럼 차 못타고 가는 거야?"


한국에서는 식구마다 한대씩 으레 있는 게 차였다. 하지만 집도 없는 우리에게 차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


오랜만에 차를 타보겠다며 신나서 조잘대며 내려온 아들에게 차 안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우리 짐이 너무 많아서 어쩌지. 아빠랑 트램타도 재미있을거야. 멀지 않다고 하니까 이따가 우리 쇼핑몰에서 만나자."


"알았어, 엄마. 새차니까 운전 조심해서 오고 좀 이따 만나."


이럴 때는 떼쓰지 않고 단번에 물러서주는 아들이 더 쓰리다. 이 뙤약볕에 트램정거장으로 향하는 부자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다시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이내 억누르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인생이 원래 계획대로 되는 건 없다. 하지만 이렇게 에어비앤비 메뚜기 뛰기로 한달동안 길바닥에 수천유로를 뿌리게 될 것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알아보던 집주인은 당장 날아와 사인 하나만 하면 집 열쇠를 넘겨줄 것처럼 보였고 남편은 미리 가서 집을 구해놓겠다며 우리보다 3일 먼저 입국했다.


하지만 이건 허무맹랑한 상상이며 야무진 꿈이었다.


남편이 입국 3일만에 준비할 수 없는 것은 대략 4530가지 정도였는데 집주인은 공교롭게도 그 중 대표적인 보험가입증명서와 6개월 이상의 급여 명세서, 혹은 프랑스인의 보증을 요구했다.


집 계약을 위해서는 집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보험에 들려면 은행계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은행계좌를 만들려면 집 주소가 있어야 한다. 집 주소가 없는 사람은 은행계좌를 만들 수 없고 은행계좌가 없으면 집 보험을 들 수 없어서 집을 구할 수 없다.


이 뫼비우스의 띠를 하염없이 돌며 은행마다 찾아 읍소한 끝에 에어비앤비 주소로 겨우 계좌를 트는 데에 우린 꼬박 한달을 썼다.


하지만 그 다음은 그야말로 신의 영역이다. 6개월 이상의 월급 명세서와 프랑스 보증인은 이 땅에 처음 떨어진 우리가 지금 죽었다 깨어나도 구할 방법이 없는 것들.


갓 태어난 아기도 세상에 나오면 담요 하나는 덮어주건만 가엾은 이 방랑자 가족에게 프랑스는 정말 모든 껍데기를 벗기고 알몸에 '이방인'이라는 문신 하나만 떡하니 새겨준 것 같았.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 13분이 걸렸다. 신형 SUV를 모는 시승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 하지만 사이드미러를 보기 위해 미어캣 마냥 목을 쭉 빼거나 회전시 기우는 박스들을 막으며 운전하기에 13분은 아쉬울 것도 없었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확인한 시각은 오전 11시. 기상청에 따르면 오늘 최고 기온은 37도까지 오를 것이고, 우리는 짐을 가득 실은 이 차에서 김치가 시어터지고 있을 6시간 동안 다음 숙소체크인을 기다리며 이 햇볕과 함께 할 예정이다.


무엇도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 그래, 그저 아무런 도난 사고 없이 이 짐들과 차가 안전히 있기만 해도 감사할 일이지.


마음을 다잡고 차에서 내리자 따가운 햇살이 머리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기라도 한 듯 온 몸을 뒤덮었다.


"엄마!"


공원 초입에서 주차장 쪽을 내내 바라보고 있었을 아들이 나를 보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트램은 어땠어? 좀 시원했어?"


"엄마, 여기 트램에는 에어컨이 없어. 창문을 열어뒀는데 너무 작아서 소용없고. 아빠가 들어갈 만한 식당도 찾아봤는데 아직 점심시간 아니라서 문 열은 곳이 없대."


갑자기 차 안에서 내가 중얼거리며 투덜댈 수 있었던 것도 에어컨이 가져다 준 여유 때문인 것 같아 아들에게 미안해졌다. 당연한 듯 누렸던 모든 것 중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처절하게 배우고 있는 기분이랄까.


더 바랄 것도 없이 그저 이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고 저 짐들을 마음껏 풀어놓게만 해준다면 어디든 감사하며 들어갈 마음마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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