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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랄라 Jun 10. 2023

9. 도우미 임무 완수!

'들어가야 하나? 그냥 기다릴까?'


잠시 쭈뼛대는 사이, 교실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잖아도 엄마가 학교에 온다는 사실에 아침부터 한껏 흥분했던 아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 붙었다.


교실에 들어서며 환하게 웃는 아들과 눈인사. 담임의 손짓을 따라 중앙 분단 맨 뒤쪽에 빈자리로 향했다. 산다는 게 항상 예상치 못한 일들을 연속이지만 내가 프랑스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들어올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안 해봤는데.


학교에서 체육이나 외부 활동이 있을 때마다 담임은 가정통신문을 통해 학부모의 자원봉사 참여의사를 물어왔다. 100% 자발적 의사에 따른 참여. 하지만 아직 학교 적응이 완벽하지 않은 아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나서야 할 것 같은 숙제같은 것이었다. 벼르던 차, 영화관람 일정 공지를 보자마자 나는 자신있게 '브이' 표시를 그려 보냈다.  


돌발변수가 많은 체험활동이나 수영과 달리 영화관람은 남녀노소, 국가불문 상영시간 동안 아무 특정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테고 기껏해야 학교에서 영화관 이동 시 아이들 인솔만 도우면 되는 일. 불어 벙어리인 나에게 이 이상의 기회는 없다더구나 아들은 한시간 넘도록 어두운 상영관에 앉아 알아들지 못하는 프랑스어 폭탄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내내 시무룩해 있었다. 


"엄마가 같이 가줄게. 무슨 내용인지 엄마랑 같이 추리해보자."


지난번 점심시간에 벌어진 사건 이후 왠지 더 기죽어 보이는 아들은 내 말에 함박웃음 지었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외엔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그거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인건가.


나의 등장으로 인해 시선이 분산됐던 아이들은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선생님은 몸에 벤 평범한 일상 루틴을 반복하듯 칠판에 날짜와 요일을 적고 칠판 옆에 있던 빨대뭉치를 집어들었다.


"어제 몇까지 세었지?"

"58이요!"

"그럼 59까지 다같이 세어보자."

"1,2,3,4,5,.......55,56,57,58,59"

"다음, 거꾸로"

"59,58,57,56,......5,4,3,2,1"


26명 아이들이 별 특별할 것도 없는 빨대뭉치에 온 시선을 모은 채 숫자를 달달 외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올라붙었던 어깨가 살짝 내려앉았다. 한편으로는 봐도봐도 늘지 않는 것만 같은 시원스쿨을 붙잡고 혼자 끙끙댈 게 아니라 나도 이렇게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들으면 좋겠다는 맘 편한 생각마저 들었다.


파일을 꺼내 오늘 요일과 날씨, 온도 등을 기록하고 선생님이 오전 일정에 대해 설명하기 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0분. 선생님의 이야기가 끝나고 출발한다는 신호를 듣자 아이들은 다시 조잘대며 설레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출발. 그래, 나도 같이 출발이다.


앞장 서 교실을 나서던 선생님은 나에게 뒤쪽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했다. 이렇게 단순간단한 주문, 바로 내가 예상한 그 그림이다.


자연스레 내 옆쪽으로 붙어선 아들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서너 걸음 걷다말고 이내 올려다보며 웃어대느라 바빴다. 


"엄마, 얘가 내 짝 레오니야. 어제 프랑스어책 어디 펴야 하는지 알려줬다는 애."


"아, 그래? 너무 예쁘게 생겼네."


우리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느낀건지 짝 아이가 내쪽을 쳐다봤다. "친절하게 알려주고 도와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친하게 잘 지내. 나중에 우리집에 놀러와서 같이 놀아" 등 해주고 싶은 말이야 왜 없겠냐만은. 그저 아이를 향해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걸로 모든 걸 대신했다.


학교에서 영화관까지는 대략 10분 거리. 걷는 틈틈이 아이들의 '너희 엄마냐'는 뻔한 질문에 아들은 세상 자랑스런 표정으로 지치지도 않고 '응, 우리 엄마야' 라는 대답을 반복했다.


'그래, 내가 얘 엄마니까 많이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줘 얘들아.'


영화관 안에는 이미 도착한 다른 학급 아이들까지 대기하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영화 관람 전 아이들의 화장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담임을 도와 다시 인원을 마친 뒤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을 따라 상영관 맨 안쪽에서부터 줄줄이 자리를 찾아 앉는 아이들.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고 조용히 봐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당부한 뒤 선생님도 마침내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영화 시작. 1번 미션을 마쳤으니 이제 2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차례다. 두손을 마주 잡고 화면을 바라보는 아들과 나. 프랑스에서 첫 영화관람(마지막일지도 모름)이 아들 학교에서 하는 단체관람이라니 참 묘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긴가민가 하던 나에게 아들이 속삭였다.


"엄마, 이거 말 안하는 영화인가봐. 아무도 말을 안해!"


"그런거 같지?"


우리는 남들 모를 희열에 큭큭대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영화에서 보이는 배우들의 몸짓은 유쾌하고 과장될 뿐이요, 흘러나오는 소리라곤 경쾌한 배경음악 뿐. 우리를 그렇게 긴장하게 만들었던 영화가 흑백 무성영화였던 것.


선생님이 알림장에 적어준 영화제목을 한번이라도 검색했더라면 진작 털어버릴 수 있는 걱정이었던 것을. 알림장 자체 내용 번역에 지쳐 넘겨버렸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아들과 나는 아무런 대사 없이 연기하는 배우들의 몸짓에 더욱 집중했다. 이것만 잘 보면 우리도 이 상영관 안에 있는 프랑스 사람들과 똑같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없던 집중력도 더 높여주는 듯했다.  


급기야 영화가 너무 재미있다며 깔깔대는 아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언젠가는 아들이 대사 있는 프랑스 영화도 이렇게 재미있게 보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영화가 끝나자 조용했던 아이들은 또다시 조잘대는 7살 꼬마들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뒤 놓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빈자리를 한번 확인한 뒤 나도 뒤따라 상영관을 나왔다. 


복도는 아까보다 더 복잡했다. 그나마 나뉘어 들어갔던 입장과 달리 영화가 끝나자 아이들을 챙겨가며 인원을 체크하는 선생님들과 도우미들은 더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인원 확인을 마친 우리는 다시 줄을 맞춘 뒤 영화관 밖으로. 


걷다가 순간순간 길가 나무와 꽃에 시선을 뺏기는 아이들을 "가자" 한마디로 인솔해가며 학교에 도착할 즈음, 아들 곁에서 걷던 아이 하나가 나를 보며 "나중에 우리집에서 같이 놀아도 돼요?"하고 물었다. "응!" 반사적으로 대답은 했는데 다음 말은 도무지 뱉어지지 않는 또 한번의 벙어리 현타가 왔지만 아이도 올라간 내 입꼬리를 보고 같이 웃었다.  


어느새 친구와 나란히 걷고 있는 아들. 학교생활이 늘 이렇게 즐겁고 신나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의 바람이 오늘 이 순간에라도 이뤄졌다는 것에 감사하며.


이렇게 도우미 임무 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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