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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랄라 Nov 26. 2020

4. Google로 하나된 의사와 임산부

번역없인 못 살아, 정말 못 살아!

출근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다.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이부터 귀에 이어폰을 꼽고 흥얼거리는 학생들까지. 트램 안을 둘러보다가 다시 핸드폰으로 구글 지도를 켜고 병원 위치를 확인했다. 'Alsace-lorraine 정거장 하차후 기차역 방면으로 300미터쯤 직진, 왼쪽에 55번지 건물 1층'.


사실 집에서부터 걸어도 20분이면 갈 거리지만 요즘 자꾸 배가 뭉치는 터라 걷는 일을 줄이고 있다. 프랑스에 온 뒤로 집 구한다 뭐한다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무리한 탓에 아기가 힘든 게 아닐까 싶어 영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이 나라에서 출산까지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도 무지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인 건 이들의 언어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막막함.


하지만 임신 12주에 기형아 검사를 한다는 소식에 더 미룰 여지도 없이 서두러 산부인과를 예약했다. 그나마 병원 예약 어플리케이션에서 영어 구사가 가능한 의사를 찾은 것이 큰 위안이랄까.


트램에서 내려 병원까지 걷는 동안 오로지 건물에 붙어있는 숫자만 바라보다가 마침내 자주색 현관문의 55번지 앞에 멈춰섰다. 건물로 들어가 계단으로 한층 올라가자 왼쪽에 'Dr. Odile Cazaban' 명패가 보였다.


 '영어가 된다고 했으니 괜찮을거야. 화이팅!'




"봉쥬! #%&*&^*#&?"

"........."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책상 앞에 사복차림의 여성분이 앉아 있는 것은 내 예상에 없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불어 문장은 단 하나. 


 "미안한데 내가 프랑스어를 못해요. 영어할 줄 아세요?"


하지만 그 분 예상에도 프랑스어를 못하는 나는 없었는지 깔끔한 "농"으로 화답(?)했다.


그리고는 잠깐의 공백 후 자신의 할 말을 꿋꿋하게 이어가는 그녀. '그래, 일단 이름을 얘기하자.'  


"빡. 마담 빡".


통했다.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농' 여사는 자신이 갖고 있던 종이를 위아래로 훑은 뒤 "빡"을 찾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뒤쪽 방을 가리켰다.


3인용 쇼파 하나와 1인용 의자 서너개가 놓여있는 그 방은 대기실이었다. 얼핏봐도 배가 상당히 나온 2명의 임산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들은 소란하게 등장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로 "봉쥬"했다. 이로서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가 불어 불능자임을 알게 됐음이 확인된 셈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로부터 약 30분을 기다린 뒤, 내 차례가 왔다. 내 담당 의사는 웃는 인상의 50대 여자분이었다.


"봉쥬, 마담 빡?"

"위"

"$@*%&%^@+&$#(@)($)%$?#%&&*&*(&#$@$#!?


얼버무려봐야 멀리 가지도 못한다. 두번의 실패는 없을거라 믿으며 아까 '농' 여사에게 했던 필살기 문장을 이어붙였다. 그런데 "아.. 오케이... 음..."하고 말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의사. 순식간에 진료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의사는 한참 서류를 뒤적인 뒤 초산인지, 마지막 생리일이 언제인지 등 서너가지 사실관계를 띄엄띄엄 묻더니 가족 병력을 포함한 기본적인 문진을 이어갔다. 


간신히 이어지던 질문과 답의 핑퐁게임에서 먼저 오류를 낸 건 내 쪽이었다. 17살에 했던 맹장수술을 얘기하려는데 단어가 전혀 떠오르질 않았다.


"빠흐동(실례합니다)"로 시간을 번 뒤 구글 번역의 힘을 빌려 Appendic surgery를 찾아냈다. 근데 이번에는 상대진영의 오류. 의사는 갸우뚱한 표정을 지으며 내 핸드폰에 씌여진 단어를 자신의 구글창에 옮겨 프랑스어로 번역한 뒤 "아!"하고는 혼잣말로 웃으며 어깨를 들었다 놨다 했다.


구글 번역기 사용 이후 서로의 형편(?) 대해 이해도가 높아진 때문일까. 그 이후 의사는 반인반수도 아닌 영어 반, 프랑스어 반을 섞어가며 아예 대놓고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선보였다. 듣다보니 정신이 바짝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멍해지는. 문득 '영어 구사'라고 표기돼 있던 병원 예약화면이 자꾸 떠올라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의사는 '반영반프' 노선을 택한 뒤 본인이 해야 할 이야기들을 쉼없이 이어갔다. 웃기는 건 그런 의사의 말을 한 데 모아보면 추리가 되더라는 것. 머지않아 나는 내가 라보라토리에 가서 피검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프랑스의 경우 종합병원 외에는 의사가 개인 사무실만 갖고 있어서 각종 검사는 환자가 검사기관에 직접 가서 검사를 받고 다시 의사에게 와서 상담받는 시스템이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봤던 것이 이었다.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 의사의 안내를 따라 바로 옆의 초음파실로 이동했다.


초음파실이라기엔 벽을 가득 채운 종이박스들이 사이에 의자와 초음파기기가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아기만 보여준다면. 의자에 누워 정면에 놓인 작은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사실 첫째를 미국에서 낳을 때는 피검사로 기형아 검사를 했어서 초음파처음인 상황.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가' 


의사가 아기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사이즈를 재며 혼잣말을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프랑스어를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 원원망스러웠.

 

혹시 방될까봐 뭐라 묻지도 못하고 간혹 튀어나오는 단어들에 의존하며 의사 표정만 살피던 중 그는 마침내 "베이비 이즈 노멀"이라는 가장 반가운 한마디를 해줬다.


"오, 진짜? 고마워! 다행이야!"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 복잡했던 머릿 속이 그의 "노멀" 한마디에 싹 씻겨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 아이가 건강하단 게 확인됐으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나.' 싶은 생각이 나의 뇌를 뒤덮으며 좀전까지 막막했던 앞으로의 산부인과 진료 과정에 한줄기 빛이 비추이는 듯했다.


의사는 A4용지에 4장 분량의 초음파 검사지와 암호 같은 글자들이 줄줄이 적힌 종이 2장건네주며 이번주 안에 피검사를 받고 2주 뒤에 오라고 했다. 그리고 고개를 있는대로 끄덕이며 "위, 위!"를 외쳤.


길가에 나서자 머리 바로 위에서 해가 쨍 내리쬐었다. 의사가 준 종이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디선가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에 주변을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아까 지나온 길에 이렇게 음식점들 있었다니. 뭔지 모를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는 생각이 들자 기념으로 맛있는 무언가를 먹어야할 것만 같았다.


그 중에 내 눈을 잡아 끈 것은 치즈향이 고소한 이탈리안 피자 가게. 정문 앞에 놓인 메뉴판들여다보던 나는 이내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구글 번역창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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