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우리의 타깃은 중고차였다. 새차 구입시 실제 차량을 받기까지 길면 3개월도 걸릴 수 있다는 이야기에 질겁한 것도 있지만 터무니없이 높은 프랑스의 새차 가격도 발목을 잡았다. 몰랐으면 몰랐지, 한국에서도 판매 중인 모델이 여기서 1천만원 가량 더 높은 걸 두눈으로 확인하고도 그 돈을 선뜻 내어줄 맘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새차 딜러샵부터 들어간 건 바로 '현금'이라는 무기 때문이었다. 사이트에 게시돼 있는 가격과 별개로, 일시불 무기를 들이미는 순간 딜러가 은밀히다른 숫자를 속삭여줄 거란 기대감이 우리를 여기로 이끈 거다.
반짝반짝 왁스 코팅된 차들이 새차 특유의 냄새를 뿜어내고 있는 전시장. 들어선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약간의 흥분과 엔돌핀이 터져나왔다.
'가격만 좀 깎아주면 새차가 좋긴 한데...'
누군가 노련하게 구워삶아준다면 쿨내 풍기며 계약서에 사인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를 즈음, 찜해놓은 모델 쪽으로 가서 자연스레 가격표로 시선을 옮겼다. 3만4000유로. 대략 4500만원이 넘는다. 다시 봐도 정이 안 붙는 숫자.
'얼마면 산다고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내 맘대로 숫자를 썼다 지웠다 하는 사이 아들이 내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엄마, 이 차 멋있다! 우리 오늘 차 바로 사는 거야?"
집을 나설 때부터 신나서 흥얼거리던 아들은 차들을 보자 춤이라도 출 듯했다. 한국에서는 으레히 식구마다 한대씩은 있는 게 차였건만 뚜벅이 생활 3개월여 만에 아들에게 차는 헬리콥터급이 될 지경이었다. 임신 6개월이 넘어서면서 눈에 띄게 배가 불러오는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야지~ 가능하면 오늘 바로 사서 최대한 빨리 탈 수 있게 해줄게!"
이런 게 엄마의 포스지. 하하.
그때 직원 하나가 우리 쪽을 향해 걸어왔다. 갈색 곱슬머리를 곱게 빗어올린 남자. 밝은 첫인상이 왠지 마음에 든다.
"봉쥬흐~"
"@$%^%&$&@#$^*(*&$???"
"아, 미안한데 우리가 프랑스어를 못해. 혹시 영어로 대화할 수 있을까?"
"농! #%^*$()@&#$^%#\$^&#$%@@%&!"
(헉. 망...)
나의 시나리오에 없던 일이다. 저렇게 단호한 농이라니.
이곳에 온 뒤로 "프랑스어를 못해요"라는 한마디를 너무 입에 달고 살아 발음이 유창해진 탓일까. 남자는 우리 말을 듣긴 들었나 싶을 정도로 아랑곳없이 프랑스어를 하며 우리를 자기 자리로 데려갔다. 영어하는 직원을 데려오려는 건가 했는데 왠걸. 그 직원은 책상에 있던 팜플릿을 우리쪽으로 돌려 보이며 프랑스어로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 사람 멘탈, 뭐지?'
남자는 잘 닦인 고속도로를 달리듯 쉼없이 차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 서로 허벅지를 쿡쿡 찔러봤지만 둘다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왕 얘기를 시작한 김에 딜이 되는지라도 물어보자."
복화술 급으로 작전을 공유한 우리는 직원이 잠깐 틈을 보인 사이 진작부터 손에 들고 있던 구글 번역을 내밀었다. 인자한 '자본주의 미소'는 필수, "우리가 현금으로 이 차를 사면 혹시 할인 혜택이 있니?"
하지만 남자는 또 못알아들을 말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표정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 같은데. 안되겠다.
"노 디스카운트?"
"농!"
.....
새차를 볼 때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끝까지 우리에게 프랑스어로 인사하는 직원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매장을 나왔다. 왠지 오늘 일진이 좋지 않을 거란 불길한 기운이 덮쳐왔다.
'OCCASION(기회. 중고품을 가리키기도 함)' 팻말이 붙어 있는 컨테이너 박스 안. 한 손에 커피를 들고통화 중인 남자가보이고 그옆사무실에는책상을 가운데 두고 고객과 이야기 중인 직원 하나가 더 보였다.
"들어가볼까?"
".... 손님 있는 것 같으니까 일단 기다려보자."
그잖아도 결정적 순간마다 소심모드가 발동하는 우리 부부는 조금 전 일련의 상황 탓에 미어캣마냥 고개를 한껏 빼서 사무실 안을 요리조리 살피기만 하다가 결국 노크 한번 하지 않은 채 차들 먼저 구경하기로 했다.
어림잡아도 백여대는 훌쩍 넘어 보이는 중고차들. 차들을 향하고 있는 내 시선과 달리 머릿속은 이번에도 의사소통이 안 되면 깨끗히 마음 접고 집에 가겠다는 다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때, 반대쪽에서 남편이 "그차 찾았어!" 하며 나에게 손짓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 이 동네 통틀어 우리가 사려는 모델 중 매물로 나와 있는 오토매틱 차량은 총 3대. 그 중 2대가 이 매장에 있는데남편은그 두대 중 하나를 찾은 거다.
1800CC 웨건형 준중형의 파란색 차량. 1년 3개월이라는 오래지 않은 연식에 새차보다 무려 1만2천유로 가량 낮은 가격. 색감도 사진으로 볼 때보다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네. 흠집들도 별로 없는데?"
"엄마... 근데 이번에도 영어하는 사람 없으면 어떻게 해? 다른 데 가볼거야?"
근심을 짊어진 건 우리 뿐이 아니었다. 불과 30여분 전까지 조잘대던 아들도 어느새 급격히 말이 줄어 있었다.
그럼에도 아들의 물음에 선뜻 "그래야지"란 말이 나오진 않았다. 다른 매장을 간다고 한들 영어하는 직원을 찾는다는보장도 없고.
그때, 아까 커피를 들고 있었던 직원이 나오더니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그놈의' "봉쥬흐"다.
"미안한데 우리가 프랑스어를 못해. 영어할 수 있어?"
"아니. 못하는데... 기다려봐."
기다리라고? 행정업무를 보기 위해 관공서를 가거나 마트에서 결제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방금 저 남자가 했던 말을 했다. 그래, 우리한테 기다리라고 한 게 분명하다. 뭔가 희망이 보인다.
우리는 다시 한번 목을 빼고 사무실 안을 들여다봤다. 누구를 불러주려는 건가? 커피남은 책상에서 아직 고객 응대 중인 남자와 몇마디를 주고 받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평온해진 컨테이너 박스 안.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주차장을 헤매는 현금을 든 벙어리들.
10여분쯤 흘렀을까.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드디어 고객을 배웅하러 나왔다. 그리곤 그의 시선은 우리에게 이어졌다.
"헬로!"
헉. 영어다. 너 였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린 사람.
"헬로! 영어할 줄 알아?"
"아, 조금? 진짜 조금인데..."
"어? 오! 아냐! 너무 반가워"
어둡던 하늘이 맑게 개이는 느낌이랄까. 남편과 나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며 남자를 따라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좀전까지 다른 손님이 앉았던 그곳에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영어맨'과 마주 앉았다.
"오토매틱 차량이 거의 없는데 너희가 찾는 모델 중 지금 당장 볼 수 있는 건 저기 세워진 1대가 전부고, 보름 뒤에 차량 점검이 끝날 예정인 차 1대가 더 있긴 해."
직원은 우리에게 두 차량의 연식과 주행거리, 가격 등을 비교해가며 설명을 해주었고 무상보증 기간 등 기본적인 정보들도 설명해줬다.
우리가 던지는 기본적 질문들에 그 직원은 성실하게 답했다. 그리고 대화를 주고 받는 틈틈이 직원이 "미안해. 내 영어가 엉망이야"하면 우리는 "아니야, 우리가 프랑스어를 못해서 미안해"로 화답하며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테스트 드라이빙 해볼래?"
"가능하다면 우리야 좋지!"
직원은 토요일이라교대해줄 사람이 없다며 신분증 확인을 통해 간단한 보험절차를 밟은 뒤 우리에게 키를 건네줬다. 지난 한달여간 인터넷에서 좌로 돌려보고 우로 돌려보던 그 차의 문이 드디어 우리에게 열린 것이다. 어색함과 얼떨떨함으로 범벅된 남편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버튼을 눌렀다. 디젤 차량답게 우렁찬 '드르릉' 소리가 터져나왔다.
"옆으로 좌회전하면 고속도로 진입로가 있을거야. 20분 정도면 되겠지?"
"그럼. 조금 이따 봐!"
직원에게 한껏 손을 흔들며 도로로 나온 우리는 직원이 얘기했던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명목은 테스트 드라이빙이었지만 우리는 차에 있는 내내 이 차를 살 것인지에 대한 전략논의에 초집중 모드였다. 언어가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 이런 나쁘지 않은 차 상태와 호의적인 딜러라니. 차에서 내릴 때 즈음엔 왠지 딜도 잘 될 것만 같은 기대가 한껏 무르익어 있었다.
매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드디어 본론에 들어갔다.
"이 차 판매 가격은 여기 적힌대로 2만490유로야. 할부로 구입할 생각이야?"
"일시불로 사려고 하는데 가격 조정이 얼마나 가능할까?"
"아, 미안. 가격 조정은 쉽지 않아. 차 값 자체를 내가 건드릴 수도 없지만 워낙 높지 않게 산정된 차라."
딜러는 이번에도 "쏘리"를 외쳤다. 하지만 내가 전혀 원치 않았던 타이밍과 의미의 "쏘리"다. 방금 전까지 사람 좋은 미소로 모니터 앞까지 바짝 다가와 있던 사람은 어디가고 딜러는 등을 의자에 거의 붙이다시피하며 우리와 간격을 두고 있었다. 적당히 곤란한 표정은 덤.
"글쎄. 보통 현금으로 구입하면 혜택이 좀 있기 마련인데 그대로라면 너무 실망스러운데?"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사실 이 부분은 세금이고... 해본다면 뒤에 붙은 400유로 정도가 최선일거야."
상황이 더 애매해졌다. 생각해보니 막연히 딜을 하겠다고 생각만 했지 프랑스에서 이런 경우 얼마나 깎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많은 건 분명 아닐건데. 그렇다고 버티기로 나가기도 여러가지로 애매하다. 아, 현금을 쥐고도 기 한번 못펴는 이방인 신세여.
우리는 결국 딜러가 처음 제시했던 가격에서 크게 의미없는 수준의 조정에 동의한 채 계약서를 썼다. 호구를 맞았을 것 같은데 호구를 맞았는지 조차 모르니 이것이 진정한 호구인건가? 그토록 기다리던 차를 샀으나 뭔지 찝찝함을 잔뜩 묻히고 매장을 나서는데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엄마, 우리차 다음주 금요일에 나온다는 거지? 토요일에 바로 놀러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까? 어디든지 가고 싶으면 말만 해. 이제 주말마다 신나게 놀러다니자!"
어차피 바닥이 빤한 벙어리 이방인 주제에 두고 찝찝할 것도 없다. 이 상황 속에서 차를 샀다는 게 중요하지. 드디어 우리가 뚜벅이 생활을 끝내게 됐다는 게 중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