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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설탕을 넣지 않아도 단맛이 있어야.

-일본 커피의 전설, ‘세키구치 이치로’(1편)

카페 드 란브르의 세키구치 이치로 씨

 


오늘은 커피의 전설이자, 일본 3대 커피 명인 중의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한다. ‘세키구치 이치로(関口 一郎)’씨. 그는 1948년 도쿄의 긴자 뒷골목에 핸드드립 커피 전문점을 열었다. 이름은 ‘카페 드 란브르( カフェ・ド・ランブル).’번역하면 호박(琥珀) 카페다. 상호에 관련된 이야기는 추후 별도로 다룰 것이다. 그는 1914년생으로, 2018년 3월 17일 10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독신으로 살았기에 카페 드 란브르는 여동생이 이어받았다. 커피를 볶으며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를, 알게 된 것은 필자에게 큰 행운이었다. 카페 드 란브르에 처음 간 것은 1990년대 중반경이었다. 당시 커피에 미쳐서 이름난 커피 명인들을 찾아다니던 시절, 그들의 커피를 직접 마셔보고 탐구하면서 커피를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지인의 소개로 카페 드 란브르에 첫발을 디딜 무렵 이미 이치로 씨는 70 중반을 넘긴 노인이었다. 그날에 마신 첫 커피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묵직한 맛에 개성 강한 커피 향기. 마치, ‘이치로 커피는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도쿄에 갈 때마다 그의 커피를 마시려고 긴자나 신바시역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나에게 드 란브르는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는데 그것은 세키구치 이치로 씨의 나이 든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갈 때마다 그는 카운터에 있지 않고 입구에 마련된 별도의 ‘이치로 코너’에 앉아 있었다. 사방 3자도 채 되지 않은 좁은 공간이 그의 특별석.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그의 몸이 불편해지면서 오후 4시쯤에 이른 퇴근을 했다. 간혹 볼일이 있어서 늦게 도착할 때면, 텅 빈 이치로 코너의 의자에 만족해야 했다. 평생을 커피에 몰두해서 그런지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았다. 내가 일본 커피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전문가 중에 커피에 미친 명인 몇 명이 있는데, 그중 으뜸이 이치로 씨였다. 란브르의 방문이 점점 잦아지면서 그의 삶과 커피가 궁금했고, 어느 날부터 그의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란브르의 커피



덧없는 세월, 어느새 그가 떠난 지 5년이 흘렀다. 지금도 내 마음에는 란브르의 격자 유리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면 그가 이치로 코너에 앉아 반길 것 같다. 나는 아직 그를 보내지 못했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것도, 그와 작별하는 과정일지 모르겠다. 지금의 마음은 그를 위해 레퀴엠의 서곡을 쓰는 느낌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도도 있다. 그의 커피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치로의 커피향기를 전해 주고 싶어서다. 그는 무려 1세기가 넘는 긴 세월을 살아 그의 체취가 향수의 미들 노트처럼 무겁고 진하다. 그래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란브르의 실내



세키구치 이치로. 그가 꿈꾸어 온 커피는 시중의 장사꾼 커피와는 사뭇 다르다. 바로 이것이 본 이야기의 주제고 이치로 커피의 본질이다. 이야기 속 시대 배경은 전후(戰後) 일본. 그는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일본에서 하던 사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독특하게 사업을 하면서도 커피를 볶았고 손님에게 손수 추출한 커피를 대접했다. 그러던 그 커피가 바로 이치로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폐허가 된 일본에서 그가 방황하고 있을 때, 그의 커피를 잊지 못한 고객의 요청에 카페 드 란브르는 자의 반 타의 반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러 고객들의 입소문으로 카페 드 란브르의 커피가 커피 애호가들 사이에 점점 알려지던 어느 날, 커피를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사 기자가 그를 커피 모임의 강사로 초대했다. 바로 오늘의 이야기가 강사로 초대된 모임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다. 그는 생전에 잡지사와 인터뷰에서도 이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 글은 당시 잡지사와 인터뷰한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했다.





도쿄에는 커피 애호가들의 모임이 가끔 있었다. 이날 모임은 커피 잡지를 발행하는 신문사의 모 기자가 주최한 것으로 커피를 좋아하는 아마추어들을 위해, 당시 저명한 정치풍자만화가인 이케베히토시(池部均)씨, 시인이자 작가로 기인의 반열에 오른 야노메 겐이치(矢野目 源一)씨, 그리고 도쿄대 불어과 교수를 비롯해 몇 명의 강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도 강사로 초대되었다. 모임을 주최한 기자는 나에게 드립 커피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모임 장소인 르오(ルオー喫茶店) 커피점에 도착했다. 커피점에는 약 2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사전에 듣기로 이번 모임은 커피를 즐기는 아마추어들이 참석한다고 했는데, 도쿄에서 이름난 커피점 주인들의 얼굴이 여기저기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아마추어라기보다는 커피 장사꾼들이었다. 그곳에 온 커피점 주인들 대부분은 내가 오래전 아마추어로 커피를 연구할 때부터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나름대로 커피에 대해 스스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전문가였다.


초빙 강사들의 이야기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아마추어 커피 애호가들을 대상으로 드립 커피 이야기를 준비했기 때문에, 자칭 커피 전문가라는 상인들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잡지사의 요청에 약속을 해버려서 강의를 진행해야 했다. 나는 먼저, 오늘 모임이 아마추어 커피 애호가들을 위한 모임으로 알고 아마추어를 상대로 강의를 준비했는데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이 이미 커피를 업()으로 하시는 전문가들이어서 부처님 앞에서 설법하는 꼴이 되어 우습다고 생각됩니다라고 말을 하고, “아무리 커피를 판매하는 상인이라도 커피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신 분들이 많아서 오늘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이어서 커피점 대부분은 미군에서 나온 커피를 사이폰으로 추출해서 고객에 판매하고 있습니다만커피색이 너무 진하고 탁해서맛이 강하고 시큼합니다사실미국은 보스턴 차’ 사건 이후 홍차 대용으로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커피색이 진하지 않습니다또한미국의 커피 도매상도 강하게 볶은 커피는 무게가 줄어서 수익이 많이 나지 않아 그렇게 강하게 볶지 않습니다언젠가 미국 커피 도매상으로부터 입수한 커피를 마셔 봤는데 맛이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그런데그 커피를 도매상에서 계속 살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고는 다음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가 커피를 볶지 않으면 뒤처질 겁니다. -중략마지막으로 말씀드린다면제가 볶은 커피는 설탕을 넣지 않아도 단맛이 살아있어 맛있게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자, 관중석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간다의 구세군 골목에서 ‘S'라는 커피점을 운영하는 점주였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참고되는 유익한 말이었지만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고 단맛이 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고 납득할 수 없습니다예로부터커피에 설탕과 밀크를 곁들여 내는 것은 정해진 것인데이제 와서 설탕 없는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승복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거짓말도 적당히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그날 커피 모임의 피날레는 자칫 싸움으로 번질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고, 몇몇 상인들은 허둥지둥 돌아갔다. 당시에는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으면 마실 수 없다고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정설처럼 되어 있었다. 그날의 강연은 그들에게 너무나 파격적이었고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깨트리는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당시 게이오 의과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동맥경화의 원인을 커피 속의 설탕이라고 발표할 정도로, 설탕은 커피의 필수품이었다. 필자가 그 시절을 추측해 보면, 일본은 전후(戰後) 시기여서 커피 상인들이 구할 수 있는 커피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였다. 그래서 거래되는 커피 대부분은 유통기간이 지나 이미 산패가 진행된 커피여서 설탕을 첨가하지 않고는 마실 수 없었다. 이치로 씨는 당시에 이런 커피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래전부터 생두를 구해 직접 커피를 볶은 것이었다.

     



란브르의 현관 입구



자,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세키구치 이치로 씨가 어떻게 란브르를 시작했는지 알아보자.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동부 군사령부 기술부대에 근무하던 그는, 제대하고 영화 기자재를 판매했다. 이치로 씨는 매일 그의 사무실에서 고객들에게 차 대신, 그가 손수 만든 커피를 접대했다. 시간이 흘러 그의 사무실은 상담이 없어도 그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선물을 가지고 방문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의 사무실이 마치 살롱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운 전후 시절이어서, 거래하던 회사들이 하나둘 도산했다. 그는 재기하려고 다시 카메라의 조명기구인 스피드라이트(strobe)를 개발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순탄치 않았다. 회사를 정리하면서 바쁘게 쫓기고 있을 무렵, 그의 살롱을 애용했던 커피 팬으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긴자에는 맛있는 커피 가게가 없어서 당신의 커피가 생각납니다오랜 세월 동안 연구해서 만든 이치로 씨의 커피를 팔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손님은 걱정하지 마세요우리가 데려갈 겁니다.”라고 했다. 그는 이 제안을 받고 1948년 ‘서 긴자’의 골목 안쪽에 카페 드 란브르 커피점을 시작했다. 그 시절, 일본 커피점 대부분은 미군들이 사용하는 원두커피를 사서 사이펀으로 추출했다. 커피 애호가들은 대부분 이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 당시, 긴자에는 커피 한잔이 90엔이었다. 그런데, 이치로 씨는 커피 한잔에 100엔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커피값이 비싸 얼마 못 가서 문 닫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의 커피는 이미 오래전부터 맛있는 커피로 알려져 있었다. 긴자 이외의 먼 곳에서도 그의 커피를 마시려고 왔고, 가게는 항상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그의 고객들은 전후(戰後)가 되어그의 커피를 다시 만날 수 있어 기쁘다.”라며 좋아했다.     


란브르의 로고가 새겨진 스테인 그라스 등


글. 이병규 / 건축사 (T. 010-3534-5334)

    - 대구 남산골에서 ‘이병규의 커피클럽’을 운영하면서 커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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