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담 Apr 07. 2022

우리에게 예술은 뭔가?

3호_건축과 춘화_일상잡담

작성 : 프로잡담러 K

게재 : Vol.3 건축과 춘화, 2018년 봄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마니아>를 권하며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곽승찬이구요, 나이는 다섯살이구요, 그리고 제 취미는……. 우리는 '자아'라는 것이 생길 즈음부터 일상의 많은 상황에서 자기소개를 할 것을 요구 받는다. 물론 있을 리가 없는 <자기소개의 정석>이란 책에 따르면, 무난하고 깔끔한 자기소개란 이름, 나이, 성별, 그리고 취미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여기서 이름, 나이, 성별은 자신이 선택할 여지가 없는 기본적인 신상정보인 반면 취미는 그렇지가 않다. 각자의 취미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경우)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닌,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취미는 한 사람의 생활상에 대한 증거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취미야 말로 가장 압축적으로 진실된 자기 자신을 표현해낼 수 있는 자기소개의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어릴 때부터 '음악감상'을 취미 소개에서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내가 음악감상을 가장 큰 취미로 강조한다 한들 거기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음악감상은 영화감상과 독서와 더불어 가장 '만만한' 취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 만약 당신의 취미가 음악 감상이 아니라 음악 연주였다면, 그건 분명히 당신을 특별하게 보이게 만들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악기 연주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악기연주가 취미다'라는 말의 배경에는 필연적으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내포되어있다. 물론 그 노력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당신이 뮤즈의 현신이 아닌 다음에야 악기 연주는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감상은 그렇지가 않다. 요즘엔 "애완견을 위한 콘서트"도 있고 한우 농장에는 모차르트를 틀어준다 카더라. 말 그대로 바야흐로 개나 소나 다 음악감상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귀를 가진 다음에야 음악 감상은 누구나가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음악감상은 그다지 특별한 취미가 될 수 없다.


음악 듣는 게 별 일 아닌 오늘, 가장 큰 위기는 평론이 맞이하고 있다. 어려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니 누구나 한 마디씩 보태면 된다. 상황이 좋지 않은 이유는 더 있다. 바야흐로 취존과 덕후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말 오타쿠 문화를 장난스레 옹호하는 밈(meme)으로 등장한 “취존”은 곧 모든 것을 잡아먹었다. ‘취향’, 더 나아가 개인적인 선호가 예술을 판단하는 ‘진짜’ 최종기준으로 믿어지기 시작했다. 소위 텍스트의 실종, ‘긴 글 읽기’의 실종에는 하이퍼링크-인식체계의 탓도 있으나 취존의 탓도 있었다. 그 모든 건 결국 독자적인 체계를 세워서 창작과 수용을 둘러싼 세상에 영향을 끼치겠다는, 근대적 지식인의 종말을 가리켰다. 모든 것은 취향의 문제이며, 내 취향이나 네 취향이나 다를 게 없으니 권위 있는 평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덕후’의 시대다. 과거 전국의 리스너들은 전영혁, 성시완과 같은 DJ들과 성문영, 성우진과 같은 글쟁이들이 ‘수입’하는 음악에 빚지곤 했다. <핫뮤직>과 라이너노트가 정보의 전부였고, 공테이프와 빽판이 매체의 전부였다. 그 시절은 지나갔다. 웬만한 음악은 멜론에 있다. 외국음악은 애플뮤직, 스포티파이 쓰면 된다. 유투브, 사운드클라우드, 밴드캠프도 있다. 의지와 약간의 돈만 있다면 방 안에서 텍사스주 어느마을 무슨촌 동네밴드 음악까지 다 들을 수 있는 거다. 한국 리스너들이 피치포크, 롤링스톤 같은 영미매체를 탐독한 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런 흐름을 타고, 장르음악 덕후들이 생겨났다. 덕후들은 각자 데스메탈만, 코어만, 트랩 등 세부장르를 파고든다. 본인이 ‘치인 것’에는 본인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버린다. 음악평론가라고 해서 그들의 청취량을 다 합친 만큼 듣기는 어렵다. 세부장르의 소식에 더 밝기도 힘들다. 된다고 해도, 그걸 다 모아서 나름의 체계를 세우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청취량과 정보량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권력은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평론이 무의미해졌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체계적인 예술론을 형성하고, 개별 작자와 작품을 논하는 글로 그것을 증명하며, 예술에 관여하는 창작-수용 그룹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무용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예술은 사적으로 작동하지만 공적으로 존재한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 인간과 세상이 맺는 관계를 상상하고 설정하기 위해서라는 거다. ‘표현의 자유’니 ‘예술의 윤리성’이니 하는 것을 둘러싼 논쟁이 많은 것도 예술의 공적 존재성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역할을 다하는 개별예술의 전략과 성패를 드러내기 위한 체계적인 시도가 사라지고, 형식에 대한 사적인 호오만 남는다면 ‘진실’은 아무도 모르게 된다. 그럼 예술 또한 무의미해진다. 물론 창작은 본능처럼 지속될 테다. 예술은 이야기되기 전에 태어났으니까. 그런데 예술이 마음에 들면 사고, 아니면 마는 게 된다면 대단한 예-술 향-유 할 필요 없이 그냥 경영-당하거나 광고-당하면 된다.


평론권력이 어제의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는데, 전략은 변하지가 않고 있다. 평론가들은 여전히 본인의 취향과 감동을 감각-치환하는 붕 뜬 글을 쓰거나, 사람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물리적인 지식들을 나열하고 있다. 평론은 역할을 주지하면서, 그에 맞춰 위치와 전략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평론은 진실의 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진실은 작가주의의 뒤주에 갇혀 죽지 않고, 장르-순수주의의 모래성에 깔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진실은 대중성의 꿀단지에 질식하지도 않기에, 평론은 대중의 편도 아니다. 요컨대, 평론은 작자를 도울 의무나 능력이 없으며, 쉽고 대중적인 폭력에 힘을 보태서도 안 된다. 평론이 할 일은 장르나 작가나 대중 어느 한 편을 택하고 변호하고 물어뜯는 게 아니다. 평론가는 그저 예술의 사실과 모양을 깨끗이 드러내야 한다. 그런 게 바로 평론가의 통찰이다. 통찰. 통찰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고, 진실을 통해 폭력을 직시하고자 글이 있고 평론도 있지 않은가 . 그러므로 표현과 정보의 향연을 내려놓자. 그게 재밌는 건 알겠지만, 그러라고 예술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물론 그러라고 예술이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건축학도들이 사랑하는 예술을 보라! 우리는 전시 보고, 음악 듣고, 영화 보는걸 좋아한다. 다들 향유하는 게 하나씩은 있다. 취향도 있다. 은연중에 그걸 과시하는 사람과, 과시하는 사람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다. 건축교육이 전인성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인지, 건축가는 종합문화인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예술이 교양을 과시하는 수단 이상이 되고 있는가? 좋은 전시를 백 개 보고 좋은 영화를 천 편 보면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인가? 힙한 음악가의 이름과 영화제를 휩쓴 감독 이름을 외우고 있으면 ‘창의력’이 생기나? 혹은 이러쿵저러쿵 마음에 들었던 점, 감동 받았던 점을 ‘40자평’으로 공유하고 나면 ‘영감’이 생긴다는 건가?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하는가? ‘와, 이 그림/영화/음악/책에서 느꼈던 감동을 건축으로 옮겨야겠어!’ 그런 마음을 먹는 건 좋은 일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예쁜 그림, 감동적인 영화, 세련된 문장이 아니라 예술의 목표와 전략 및 그것의 성패를 밝혀내는 통찰이다. 목표가 흐릿하고 전략이 싸구려인 예술은 때로 하루를 즐겁게 만들어 줄지는 모르되 예술로써 존재할 필요는 없다. 


이 책, <레트로마니아>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런 지점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시의적절한 방식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가 드러내는 세상의 양태, ‘가까운 과거를 무작위로 소환한다’는 예술의 진실도 물론 중요하다. 그는 시간의 방향성이 사라진 세상에서 음악, 나아가 예술이 어떻게 전략적인 위기에 처했는지를 명백히 드러낸다. 그러나 더욱 가치 있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 음악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다. 그는 어지러울 정도로 빽빽한 팩트를 명쾌한 통찰로 엮어낸다. 그러면서도 의견과 사실을 명백히 구분해서 모더니스트로써의 취향을 공기처럼 드러낸다. 예술의 사적인 작동성과 공적인 존재성이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물론 우리는 평론가가 아니다. 통찰을 통해 밝혀낸 진실의 내용을 두고 다투는 것은, 통찰의 정합성이 담보된 이후의 일이며, 평론가의 영역이다. 사이먼 레이놀즈가 그려내는 음악예술의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 또 다른 평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다투며 진실에 가까워 질수록,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예술이 제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 또한 명확해진다. 창작자는 평론이 밝혀내는 오늘의 지형도 위에서 내일의 길을 만들어갈 것이다. 다시, 평론은 그들이 제안하는 길의 성패를 기록한다. 그러나 그 순환계가 정상작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용자 대중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는, 특히나 예술을 사랑해 마지 않는 건축학도들은, 예술의 역할과 그에 따른 작동방식을 인지해야 한다. 그 과정을 인지해야만, 대중은 예술에서 배운 것으로 각자의 자리에서의 진보를 실천할 수 있다. 세상은 결국 우리 모두가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어제를 떠나고 오늘의 방식으로 작동할 때에야, 내일의 세상이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정성일의 말을 빌려 본다.


“…그 예술을 사랑하는 건 결코 스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스타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술을 사랑한다면 그건 아직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술를 사랑하는 건 결코 이야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술을 사랑하는 건 그건 아직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술을 사랑하는 건 그건 아직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술을 사랑하는 건 결코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술을 사랑하는 건 그 예술이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예술을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그 방법이다. 그리고 또 다른 예술을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말하자면 예술을 사랑하고 또 하면서도 갈증에 시달리는 것은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만족할만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다….” 


여기 있는 ‘예술’은 모두 내가 원문의 ‘영화’를 무단으로 고쳐 쓴 것이다. 정성일은 영화를 이야기하지만, 단어를 바꿔 써도 그의 말은 유효하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기에 건축을 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건축을 해야 한다. 정성일의 말처럼 예술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며, 그래서 나와 세상이 맺는 관계를 (재)정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에 관한 속삭임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에 있지 않다. 사랑은, 사랑 안에 있을 따름이다




WRITTEN BY

프로잡담러 K | 곽승찬 | ksc243@naver.com


매거진의 이전글 진보 못 하는 정치, 진보하는 공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