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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Sep 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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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_건축과 설레임_특별잡담

작성 : 프로잡담러 Q

게재 : Vol.14 건축과 설레임, 2021년 봄

 

 

‘첫-’ 이라는 접사는 그 자체로 마법이다.


‘처음’ 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두근거리는 순간이다. 첫눈, 첫 만남, 첫사랑, 첫 시험….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첫-순간을 맞이한다. 그 순간은 인생이라는 긴 시간 중 한 번의 사건에 불과하지만, 그저 첫-이라는 접사가 붙어있다는 사실 만으로 평범한 경험에 ‘설렘’이라는 설탕이 뿌려진 것이다.


새내기들과 캠퍼스의 첫 만남은 갓 입학한 학생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는다. 힘들었던 수험생활을 끝내고 대학생이 된 그들은 각자 대학교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고 꿈꾼다. 인생의 새로운 장에 자신만의 ‘제목’을 붙이고 새로운 일상과 꿈을 상상하는 것만큼 설레고 신나는 일이 있을까? “바로 여기에서” 펼쳐질 꿈같은 대학 생활을 그리는 새내기의 설렘, 오늘은 우리를 설레게 하는 대학 건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은 대학 고딕 양식에 관한 이야기.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예쁜 캠퍼스의 대명사, 흔히 튜더양식이라고 불리는 대학 고딕 양식은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사랑받는 대학건물의 대표양식이다. 그러나 중세시대의 건축양식인 고딕 양식이 대학 건물 양식의 대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생각만큼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대학 고딕 양식의 건물들과 중정형 배치, 대규모의 캠퍼스는 미국 남북전쟁 전후로 교육과 사회가 크게 변화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 단일 건물로 존재하던 이전의 대학과 달리 이후의 대학은 한정된 부지 내에서 구획을 나누고 건물을 지었으므로 기존 캠퍼스 건물에 적용되던 고전주의 양식의 엄격한 대칭, 조화, 균형은 유연한 공간배치를 방해하는 요소였다. 때문에 고전주의 양식은 다른 건물과의 조화를 유지하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고딕 양식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고 오늘날 대학건물의 대표양식으로 고딕 양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본관


대학 고딕 양식 건축물은 중세 고딕 양식의 건물들과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주재료로 돌을 이용하기에 벽의 하중을 견디기 위해 발달한 아치, 외벽을 지탱하는 기둥, 천장의 리브 볼트 등 고딕 양식의 기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중세고딕 양식처럼 건물을 뾰족하고 높은 첨탑으로 치장하는 대신 좀 더 사각사각한 터렛을 이용해 절제된 형태로 지어졌다

.

대학 고딕 양식 건물들의 고풍스러운 이미지는 단순하게 외관의 아름다움만으로 마음을 사로잡지는 않는다. 영화나 게임 같은 미디어 콘텐츠에서 나올 법한 신비스러운 학문의 향기가 나고, 저 모퉁이를 돌면 당장이라도 역사 속의 학자들이 토론하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느끼는 설렘이 있다.


건축가들은 "고딕"스러운 느낌으로 대학 건물을 설계하면서,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지식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고자 하지는 않았을까?



신고전주의에 관한 짧은 이야기.

근대기 한국 대학의 설립은 선교집단과 민족주의 집단이 축이 되어 이끌었다. 외국에서 유입된 선교 세력은 외국의 건축을 모방해서 지었기에 당시 외국에 유행하던 대학 고딕 양식으로,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에 유행하던 목조 르네상스식 건축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의미로 석조 건축물인 대학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국의 대학 건축양식의 출발은 고딕 양식부터였다.


반면 외국의 경우 고딕 양식이 자리 잡기 이전에도 다양한 대학건축 양식이 있었다. 오랜 시간 대학 건축 양식의 대표 역할을 맡아왔던 신고전주의 양식은 오늘날에도 대학 건축의 대표양식으로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하곤 한다. 엄격한 비례와 대칭의 원리가 특징인, 고대 그리스 신전에 사용되던 고전주의 건축을 이어받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학건물들은 그 자체로 신성하고, 그 자체로 무거운 공간이다. 신전의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마치 지식이라는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 같은 분위기를 잔뜩 풍긴다.


경희대학교 본관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은 고전주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유사하다. 석재로 마감했지만, 고딕 양식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고딕 양식의 돌벽이 울퉁불퉁한 벽돌로 이루어졌다면, 신고전주의 건물의 외벽은 반질반질하게 정돈되어 부드러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좌우 완벽한 대칭을 이룬 구도로 양옆으로 길게 뻗은 회랑과 회랑을 따라 설치된 많은 기둥. 그리고 기둥 위에 놓인 화려한 장식의 삼각 페디먼트. 철저하게 계산된 공간 속에서 엄숙함이 느껴지는 신고전주의 양식건축물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저 기둥 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침을 튀기며 걸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어느새 철학의 깊은 향에 두근거린다.



마지막으로 현대건축 양식의 이야기.

대학 캠퍼스에는 시대가 변하면서 유행에 맞춰 새로운 양식의 건물이 들어섰다. 시간이 지나면서 필요로 하는 공간이 늘어나기도 하고, 이전의 것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공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고딕 양식이나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은 물론이고, 모더니즘, 하이테크 건축 등 재료와 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건축양식 역시 대학 건물에 적용되어 지어졌다.


최근에 지어지는 대부분의 건축물은 대부분 현대건축 양식으로 지어진다. 위에서 소개한 양식이 주는 장엄함과 무게감을 느낄 수는 없지만, 현대건축 양식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


현대 건축양식이나 건축물들을 보면, 과거처럼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특성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건축가들 저마다의 가치관과 의미를 건물에 새기기에 비슷해 보이는 건물이라도 사실은 전혀 다른 내용이 담겨있는 경우도 있고, 전혀 다른 형태로 같은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다양하고 정제되지 않은 양식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의 사회, 지식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서울대학교 도서관


전문가들에 의해 지식이 주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는 개개인도 자신만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고, 그렇기에 문제해결을 위한 하나의 정답이 아닌 창의적인 대답의 가치가 더 높게 평가받고 있다. 양식에 얽매이지 않은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형태, 통유리를 이용한 투명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외벽, 석재 대신 철재와 세라믹 등을 이용한 유연하고 가벼워 보이는 건물들. 건축가가 의도했든 안 했든 현대건축의 이러한 특성들은 대학교의 성격, 대학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꽤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결론

처음 봤던 그 날의 설레던 공간은 이제 매일매일 산더미처럼 쌓이는 과제와 강의에 치여 어느새 일상의 배경으로 전락해버렸다. 두근거리던 정문은 이제 친구들과의 약속 시각을 기다리는 장소가 되었고, 후문은 약속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목구멍까지 가득 찬 알코올을 비우고 오는 곳이 되었다.


사실 학교 건물에도 잘 찾아보면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이 숨어있는 듯하다. 각각의 양식도 규모도 다양하지만 저마다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일상의 배경으로서의 학교가 아니라 건축물로서의 학교로 답사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처음 공간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설렘을 떠올려보면서 자신이 그날 붙였던 “제목”은 아직도 나의 생활과 잘 어울리는가 돌아보자.


참고문헌

김병완, 김영재. (2019) 국내 근대 학교건축에서의 대학고딕 양식의 수용. 대한건축학회논문집

원혜림. (2013). 대학들은 왜 고딕 양식 건축물일까? 고대신문

신경. (1995). <디자인탐구>신고전주의-불룩한 기둥.조각장식 특징. 중앙일보


도판 출처

사진1 도판출처: 고려대학교 공식 SNS (@korea_university_official)

사진2 도판출처: 경희대학교 공식 SNS (@kyunghee_university)

사진3 도판출처: 서울대학교 공식 SNS (@snu.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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