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궁일기 #1
퇴사 1주년(?)을 맞이하며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었다. 남자친구가 파울로 코엘료의 <아처>를 읽더니 국궁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양궁도 아니고 국궁이라고?
올림픽 덕분에 양궁이 더 익숙했던 나에게 국궁은 너무나 낯설었다. 입에도 잘 안 붙었다. 국궁을 발음하려고 하면 ㅇ이 먼저 튀어나왔다.
ㅇ..양궁 아니 국궁!
신기하게도 우리 동네 멀지 않은 곳에 국궁장이 있었고 남자친구는 나를 꼬드겼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뭐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에 따라가서 등록을 했다. 비쌌으면 망설였을텐데 시에서 운영하는 거라 가격이 저렴했다. 입문활쏘기 강좌는 3개월 과정인데, 한 달 수강료가 4만원이다.(시외 거주자는 50% 할증이 붙는다.)
게다가 활과 화살도 다 대여해준다.
이렇게 저렴한 취미생활이라면 일단 해보는 걸로...!
수업 첫날, 막상 가려니 조금 두렵고 무서웠다. 운동신경이 없는데 괜찮을까, 잘 할 수 있을까, 재미없으면 어쩌지 등등. 온갖 불안함을 안고 집을 나섰다.
수강생들은 나 포함 모두 8명, 나이대는 천차만별이었으나 그중에 내가 제일 어렸다.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은 75세. 나와 무려 47살이나 차이가 났다. 나와 그분 사이에 있는 47년이라는 세월을 감히 상상해 보려 했으나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린 이 수업에서 같은 출발선에 서있는 똑같은 입문자다. 그 사실에 기분이 참 묘했다.
우리가 신청한 반은 평일 오후 주 2일반이고 하루에 2시간씩 수업을 한다. 2시간 동안 계속해서 서서 수업을 듣게 된다. 듣는 우리도 우리지만, 국궁지도사이신 사범님도 함께 서서 수업을 하셨다. 정말 열정적이셨다.
막상 수업이 시작되니 누구보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수업을 들었다. 늘 이런 식이다. 뭐든 시작하기 전엔 두려움, 막막함이 앞서기에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깨고 직접 실행에 옮기면 불안이라는 안개가 걷힌다.
전통 활쏘기인 국궁은 한민족 오천 년 민족문화를 지켜온 호국무예로서, 2020년 국가 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심신수련과 정신 수양에 탁월한 국궁은 예의와 규범을 중시하며 선비정신이 깃들어져 있는 전통 스포츠이다. 국궁을 통해 건전한 스포츠 정신 함양과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 강좌 소개 중
수업은 예절에 관한 것부터 시작됐다. 복장 수칙, 궁대(활을 담는 자루)를 허리에 매는 법, 국궁장 이용방법 등.
활을 쏠 때에는 입지 말아야 할 옷들이 있다. 단추가 달려 있는 옷, 팔 통이 너무 큰 옷, 지퍼가 달린 옷, 민소매 등이다. 복장 수칙은 진짜 오래 설명하셨는데 그만큼 중요하다고 했다. 이게 다 안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레깅스나 노출이 심한 옷은 입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다. 활쏘기 특성상 고령자분들도 많으시고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예의를 위해서라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고리타분한 규칙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활쏘기가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인 만큼 전통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이 됐다.
오늘은 활에 관한 용어 설명을 듣고 활을 얹고 부리다가 수업이 끝났다. 활을 얹는다는 것은 시위(줄)를 활에 걸어놓는 것, 부린다는 것은 걸어놓은 시위를 벗겨낸다는 의미다.
활을 사용할 때는 시위를 걸어 얹은활 상태로, 보관할 때에는 시위를 풀어 부린활 상태로 둔다. 생전 처음 듣는 용어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수업이 끝났다. (실제로 도고자라는 단어를 듣고, 도곶아인지 도곧아인지 독오자인지 혼자 엄청 고민함..)
수업이 끝난 후, 신이 나서 남자친구한테 쫑알거리며 계속 말을 걸었다.
"활 부리고 얹는 거 왜 이렇게 어려워? 봐봐,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질문이 생긴다는 건, 관심이 생겼다는 방증이겠지.
국궁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스포츠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의 시간이 조금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