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정리를 시작합니다
33년의 마지막 근무를 뒤로하고 집으로 향하는 마음은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편안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는 책임에서 자유롭고, 일요일 저녁은 덜 불편하며, 금금금으로 이어지는 시간은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회사를 떠나는 선배를 다정하게 안아주고 마무리해 주는 후배들 덕분에 그래도 잘 살았구나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성격은 퇴근시간을 일분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33년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집안의 모든 창고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행동을 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 안사람도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퇴직 후 시간은 6개월 정도 연착륙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말을 하더군요.
특히 월요일 아침을 어색하게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창밖 길게이어진 출근차량을 보면서 회사까지 신호등이 몇 개였나 셈도 해보고 여유로운 시간의 호사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많은 퇴직자의 글을 보면 아침 기상시간이 조금씩 늦어지고, 식사시간이 불규칙해지며, 더불어 소화기능이 변하면서 생체리듬은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간다고 말하더군요.
기상시간에 맞춰 일과를 시작하는 군대생활과 전역 후 생활 리듬의 패턴과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연착륙의 희망은 퇴직 후 3일이 지나면서 내밀한 경착륙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창고를 정리해! 무엇인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나는 월요일 아침을 시작했습니다
창고정리가 내일까지 마무리되지 않으면 당신의 퇴직은 무효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런 두려움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최선을 다해서 창고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창고에는 젊은 시절부터 가족의 오랜 흔적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사용하던 컴퓨터와 2G 폰부터 언제 사모았을까 싶었던 캠핑용품으로 가득했습니다.
오래전에 버려져야 할 운명을 이어가는 수많은 아우성과 함께 말입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창고를 보면서 왜?라는 질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창고의 짐들은 마지막으로 정리되어야 할 퇴직의 순서였습니다 33년을 정리한 것처럼 창고에 있는 버려야 할 짐들은 내게 선택적 사고를 요구했으며 남겨 두었던 결재서류와 같은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창고의 버려야 할 품목이 아니라 그 창고에 담아두었던 개인적인 세월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리되지 못하고 창고에 남아있는 오래된 물건들은 스스로 몸집을 늘려가는 것처럼 소리 내고 있었으며, 나는 그런 아우성을 귀에 담지 못했고 세월은 저마다 다르게 흘러갔던 것 같습니다.
그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창고 앞을 지나갔을 것이고 무료한 일요일에도 창고 앞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창고에는 오래된 물건의 세월과 30년의 직장생활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서 모든 마무리의 희망처럼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이제는 창고를 정리하다가 출근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내밀한 그 세월을 보고 싶었나 봅니다. 퇴직의 마지막 순서처럼 말입니다.
퇴직하면서 33년을 정리하고 나왔던 것처럼 제게 남은 것을 정리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심한 논리의 비약 입니다만 창고가 정리됐으므로 이제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겠구나 하는 동기를 내게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고산을 등산하는 전문가의 반복되는 계획처럼 그렇게 오랜 세월의 등산을 마치고 다음을 준비하는 전문가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꺼내놓았던 창고의 물건은 그대로 위치만 변경하여 다시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정말 세월을 정리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때가 오래 걸리지는 않고 다시 올 것만 같아서 말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개인적인 성향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