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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말이라고 하니?

여름 방학 생활계획표

by 아키세라믹

방학을 시작하면 동그란 모양의 생활계획표가 잘 보이는 벽에 딱 붙습니다.

일 년을 브런치에서 행복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의미 있는 글쓰기 수업으로 자평하고 싶습니다.


힘들 때마다 퇴색해 버린 의미를 마주하게 됩니다.

분명히 고단한 여정임을 알면서 시작했지만 어느 중간쯤 저는 처음의 마음과 멀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왜 안 오나 했습니다.


늦게 시작한 도적질같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버릇 남 주지 못하는 것처럼 절반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시작하기 어렵지만 시작하면 곧잘 하거든요 그런데 가던 길이 힘들면 곧잘 하던 열의가 눅눅한 장판지처럼 내려앉아 들뜨기 시작하지요.

그래 그럴 때가 됐지 이상하다 했어.


이런 말씀은 쓰는 것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아시겠지요?. 보통 그렇지 않은가? 하시는 분과

그래서 정말 잘났다 잘났어 얼마나 했다고 징징거리지?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저 사람 안달뱅이 아닌가 싶으시지요? 걸핏하면 안달하는 사람 혹은 소견이 좁고 인색한 사람을 말합니다

자발없는 사람은 행동이 가볍고 참을성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는 얼마나 속상하고 창피한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하라고 했으면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방학을 해 볼까 싶었습니다.

방학을 핑계 삼아 좀 놀다가 돌아오면 기운이 불끈불끈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방학은 평소의 커리큘럼과 다르게 보내야 진정한 방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긴장했던 정신줄을 풀어주고,

강박에서 벗어나고, 밥때도 흩트려서 먹고 싶을 때 먹기도 하는 것이 방학의 묘미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운동하지 않고, 생각하지만 절대 쓰지 않고, 씀을 대하는 태도에 무관심하기로 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잠시라도 멀리하면 불안한 마음이 들고 그 마음이 자리를 비울까 싶어 초조해지겠지만 언감생심입니다. 그렇게 바랄 수 없는 일입니다.


쓰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불안해지고 초조해질까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여기저기 생각보다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은 쓰면 없어지던가요? 복용한 진통제가 삼일을 가던가요?


삼일이나 고통에서 나를 벗어나게 하는 진통제가 없는 것처럼 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그때처럼 한 번의 위로는 짧은 위안처럼 볼품없을 때가 많지 않던가요? 저만 그런가 싶습니다.


우리가 운동선수는 아니지만 심지어 구기종목의 룰은 잘 모르지만 때때로 운동경기를 보고 즐거워하지 않던가요? 내가 운동선수였다면 더 행복할까요?


나의 행복은 나의 삶이 얼마나 심화되어야 충분히 행복할까 싶습니다. 이런 괴변 속에는 나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고약한 변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 최명희 작가님도 안 쓰면 얼마나 좋을까 하시던데요.

씀을 업으로 하시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창밖에서 극한의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입장이었습니다. 지금은 밖에 서 있더냐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쓰지 않거나 쓰거나 행복하다는 명제를 앞에 놓고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 집니다.

도파민 같은 행복 속에서 씀으로 충분히 행복하다면 님의 행복은 만족스러운 것일까요?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통증은 진통제 하나로 삼일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써도 행복하고 쓰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써도 행복하지 않고 쓰지 않아도 이와 같다면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요?


계획한 방학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까요?

말씀드린 변명이 참 궁색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술로 얻고 싶다면 그만한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어색한 분위기와 초조함과

마법 같은 이끌림과 불현듯 다가오는 슬픔 같은 것들이 몸을 통과하도록 두어야 한다]

<겨울의 언어 : 김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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