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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은둔자 Jul 20. 2017

파리에 남아있는 로마시대 유적들

카르도, 포럼, 공중목욕탕, 아레나

로마가 파리를 점령하고 시테섬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300년 경부터였다.

그때 파리는 파리가 아니라, 뤼테스란 이름이었고, 뤼테스에 살고 있는 골족의 이름은 '파리지'였다.

그래서 프랑스의 역사에서는 로마 점령기를 로마시대라고 부르지 않고, 갈로-로만 시대라고 부른다.

분명, 골족의 문화 위에 로마의 문화가 들어와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두 개의 이름을 나란히 붙여서 부르는 것이 골족의 후예인 프랑스인들에게는 정당하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만들 때 수직의 축과 수평의 축을 교차시키고, 그 중심을 도시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리고 두 개의 축과 중심의 주변에 포럼, 극장, 공중목욕탕, 아레나를 배치했다.

그중 공중목욕탕의 일부와 아레나의 일부 유적이 파리에 남아있다.


1. 포럼 2/3. 공중목욕탕 4. 클뤼니 공중목욕탕 5. 극장 (남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아레나(Arènes)) 노란구역은 주거 유적이 발견된 지점, 붉은 선은 루테스 시대의 길.
그림의 위쪽은 남향, 세느강의 좌안이고, 아랫쪽은 북향이다. 그림의 왼쪽은 동향, 오른쪽은 서향이다.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 카르도인 생자크 길이다. 지금도 이 길은 남아있다.


위 지도와 그림에서 로마의 도시 구성 원리 중 남-북축 '카르도'가 중앙에 선명히 보인다. 루테스의 카르도는 지금도 남아있는 '생자크 길 (Rue Saint-Jacques)'이다. 이 카르도는 정확하게 시테섬의 중앙을 관통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동-서축은 '데쿠마누스'라고 부른다. 루테스의 데쿠마누스는 세느강이었다. 세느강이 가로축을 담당한다는 것은 강이 교통수단으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시테섬의 서쪽에는 로마군의 주둔지, 집정관의 관사이자 병영, 재판소의 법정이 자리 잡았고(그림에서는 오른쪽), 동쪽으로는 신전을 세웠다(그림에서는 왼쪽). 집정관의 관사, 병영, 법정 자리에 현재의 파리 고등법원, 그러나 10-14세기까지 왕궁으로 쓰이던 '시테궁 (Palais de la Cité)'이 지어지고, 신전이 있던 자리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지어지게 된다.

아레나(그림에서는 왼쪽 위)는 도시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는데, 도시의 인구보다 더 많은 17,000명의 관객을 수용하는 거대 규모의 건물이고, 살벌한 격투장이자 피가 낭자한 살해의 현장이기 때문에 도심에 들어올 수 없었다. 당시의 루테스 인구 규모는 5,000-10,000명으로 추정한다.


왼쪽 그림은 루테스의 본래 모습을 복원한 모습이고, 오른쪽은 일부가 잘려나간 채 복원된 현재의 모습이다.

잘려나간 왼쪽의 지하에는 10호선이 지나가고, 위로 도로와 주택이 지어져서, 아레나의 입구는 주택의 한 부분을 뚫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눈을 비비고 잘 찾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수 있다.

아레나는 황제와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건축물이고, 도시민들에게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래서 주변의 도시에서도 몰려들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아레나는 극장의 무대와 배경이 한 부분에 배치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아레나는 햇빛을 가리는 천막을 조절하는 설비도 갖추고 있었다.


귀족들은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지정석이 있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정말 놀랍게도 물을 끌어들여서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 배들끼리 싸움을 하는 거대한 규모의 공연을 하기도 했다. 루테스의 아레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대에서는 연극이, 전투사의 결투가, 사나운 맹수와의 목숨을 건 사투가 벌어지는 장소였다. 아레나는 1세기경에 지어졌는데, 중세시대로 넘어가면서, 피를 보는 오락을 금기하면서 점차 잊히고 폐허가 된다.


파리의 중심에 남아있는 또 다른 갈로-로만 시대의 유적은 공중목욕탕이다. 현재는 클뤼니 중세 박물관으로 불린다. 이 건물은 13세기에 클뤼니 교단에서 구입하고, 클뤼니 수도원장의 저택으로 사용했다. 그때 공중목욕탕의 부분을 일부 남겨두고 저택을 지었기 때문에, 현재 중세의 저택과 고대의 유적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왼쪽의 사진은 구글 맵에 이전의 공중목욕탕 도면을 겹친 것이다. 불바흐 생미셸과 불바흐 생제르망의 모서리에 있어서 지나가며 쉽게 보이는데, 실제 무슨 건물인지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공중목욕탕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었다. 아주 소액의 입장료를 받기 때문에 대중에게 열린 공간이고, 사교의 공간이기도 했다.

오른쪽의 목욕탕 다이어그램을 보면, 목욕을 하는 4단계의 공간이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1단계는 양쪽의 노란 공간, 팔레스트르(palestre)에서 운동을 하여 땀을 낸다. 2 단계로 가운데 분홍색의 템피다리움(tepidarium)을 거치는데, 이곳이 온탕이다. 3단계는 칼다리움(caldarium)은 열탕으로, 로마가 발명한 히포코스트(Hypocauste)로 바닥을 덥히는데, 우리의 온돌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가열시스템이다. 그리고 4단계가 프리지다리움(frigidarium)인 냉탕을 마지막으로 목욕의 과정은 일단락된다.

그 외 입구(entrée(s))에 들어와서 거치게 되는 곳이 베스티뷸(vestibule)로 전실에서 목욕 준비를 한다. 공중목욕탕에 도서관도 갖춰져 있는데, 이곳이 커뮤니티의 지적인 모임 장소 역할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공중목욕탕은 로마의 건설기술이 집약된 것이다. 먼저 맑은 물을 도시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퀴딕(aqueduc)을 건설해야 했는데, 아퀴(aque)는 라틴어의 물이란 단어 '아구아(aqua)'와 '딕(duc)'은 관을 뜻한다. 즉 물을 주입하는 관을 말하고, 우리가 '수도교'라고 하는 것은 그 관을 이동시키기 위해 건설한 다리, 즉 수도관을 이동시키는 구조물을 부르는 것이다.

파리로 들어오는 수도교가 카샹(cachan)이라는 지역에 일부 남아있다. 총 60-160km 거리에 있는 세 개의 수원에서 물을 옮겨와 매일 145, 000m3(큐브)의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이 수도교는 물을 옮기는 기본 원리가 낙차를 이용해서 이동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수압을 조절하는 기술도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 수도교를 짓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로마가 두 가지 건축기술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첫째가 구조적 해결이 가능하게 한 '아치'의 발명이고 두 번째는 '시멘트'의 발명이다. 그리고 열탕 목욕탕이 가능했던 것은 위에서 말한 히포코스트 덕분이다. 그리고 깨끗한 물이 들어오고, 더러운 물을 뺄 수 있는 배관설비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왼쪽의 그림은 물을 덥히는 설비를 보여주고 있고, 왼쪽은 공중목욕탕의 화려한 실내를 복원한 그림이다. 오랜 세월로 빛을 잃기는 했지만, 클뤼니 유적은 목욕탕이 화려한 채색으로 장식되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고, 고고학자들이 로마시대의 색채를 다시 살려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로마시대의 건축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포럼이었다. 포럼은 정치과 행정의 중심지였고, 종교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상업 중심지 이기도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파리에는 포럼의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

왼쪽의 사진은 파리의 팡테옹 건물 맞은편에 루테스의 포럼을 복원해서 넣은 것이다. 포럼은 그 규모도 100m*200m로 거대했다. 한쪽 편에는 신전이 세워지고 반대편에는 바질리카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건물을 바깥으로 둘러싼 지붕은 작은 상점들이 촘촘하게 모여있는 것이다. 포럼의 광장은 신전에 바치는 제물이 희생되는 신성한 장소였고, 정치적 토론이 벌어지는 활기찬 무대였다.

포럼의 자리는 파리에서 가장 높은, 주느비에브 언덕에 세워진 것이다. 물론 언덕이라는 말이 쉽게 와 닿지 않겠지만, 팡테옹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높은 계단을 만나는 구역들이 종종 있는데, 그때 비로소 '주느비에브 언덕'이라는 명칭이 조금 이해가 된다.


어쨌거나, 포럼은 지금은 볼 수 없지만, 포럼의 주변은 팡테옹을 비롯하여 여전히 라틴 구역의 핵심 건물들이 요소요소에 들어있다. 유명한 소르본 대학은 물론이고,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국립 고등학교, 루이르그랑과 앙리 4세도 이곳에 있고, 그랑 에꼴 중의 대표주자, 에꼴 폴리테크닉도 팡테옹 주변에 있었다. 물론 지금은 멀리 이사를 갔지만, 그때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프랑수와 1세가 만든 꼴레쥬 드 프랑스(물론 이전의 이름은 왕실 꼴레쥬, 소르본도 초기에는 꼴레쥬 드 소르본)가 있다. 이 지역은 그야말로 프랑스의 인텔리들이 총집합된 구역이고, 그 시작은 포럼과 공중목욕탕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파리에 남아있는 중세의 흔적, 중세의 왕궁과 중세의 주거를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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