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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은둔자 Mar 09. 2018

파리에 남아있는 로마의 향기

고대부터 절대왕정과 제정까지, 로마와 이태리를 향한 끝없는 욕망

파리의 도시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뚜렷한 로마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을 본다.

로마가 파리를 점령하던 시기, 식민지 파리에 남겨놓은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있다.

아레나, 공중목욕탕은 일부 훼손이 되긴 했지만, 당시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


파리 5구에 위치한 아레나(왼쪽)와 클뤼니 박물관의 공중목욕탕 (오른쪽)


 베르사유궁(궁의 앞면은 프랑스 양식, 뒷면은 이태리 양식)을 건설한 태양왕 루이 14세는 파리를 로마로 만들고 싶어 했다.

루이 14세는 샤를 5세가 파리에 쌓은 성벽을 허물면서 생드니 문(Saint Denis)과 생 막땅(Saint Martin) 문을 자신의 전승기념 개선문으로 세운 것이 대표적이다. 루이 14세가 로마 황제의 옷을 입고 있는 조각은 쁠라스 빅투와르(Place des Victoires 승리의 광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르사유궁의 비너스 살롱에 있는 루이 14세도 로마 황제의 모습이다.

그 외에도 파리에서 로마의 황제 복장을 한 루이 14세는 카르나발레 박물관 마당과, 루브르궁의 유리 피라미드가 있는 나폴레옹 쿠흐(cour Napoléon)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베르사유궁 비너스 살롱의 대리석으로 된 루이 14세(왼쪽), 머리에는 월계관을 쓰고 로마의 복장을 한 말탄 루이 14세(가운데), 카르나발레 박물관 마당의 루이 14세(오른쪽)


루이 14세의 재상 꼴베르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니니(Bernini)를 초대한다. 그는 교황의 예술가로 당시 베드로 성당 건축을 맡고 있었다. 그에게 루브르궁의 확장 건축을 맡기려고 하지만, 당시는 점차 이태리의 영향에서 벗어나며 프랑스 고유의 건축과 예술이 발현되는 시기여서, 루이 14세의 조각 작품과 발 드 그라스(Val de Grâce) 성당의 제단 등을 남기고 큰 작품은 맡지 못한다.


베르사유궁의 다이아나 살롱에 있는 루이 14세의 흉상(왼쪽)과 루브르궁에 있는 태양왕의 말탄 조각(오른쪽)


루이 14세뿐 아니라 나폴레옹도 자신을 로마의 황제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폴레옹은 방돔 광장에 있던 루이 14세의 조각이 치워진 자리에 자신의 조각을 설치한다.

오스테리츠 전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전승 기념탑을 청동으로 높이 세우는데, 이 탑은 적군에게서 빼앗은 대포를 녹여서 만들었고, 전쟁의 장면 장면을 세세하게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로마의 황제 옷을 입은 자신의 조각으로 장식했다.


방돔 광장은 릿츠호텔과 럭셔리 보석가게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 중앙에 우뚝 솟은 탑은 나폴레옹의 전승기록을 새겨놓고 그 정점에 로마의 황제를 빙의한 나폴레옹이 군림하고 있다.



로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대표적인 도시의 건축물은 바로 개선문이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두 번째 결혼식에 맞춰서 완공하고 싶었던 지금의 개선문은 당시에 공기를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거대한 그림으로 대신해서 개선문의 모습이 배경으로 장식된다. 이 개선문은 프랑스의 중요한 국경일, 독립기념일 행사가 시작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지금의 샹젤리제 거리가 조성되기 전부터 튈르리 정원에서부터 개선문으로 가는 넓은 길은 파리지엥들이 사랑한 산책길이었다.

위에서 말한 개선문의 건설은 루이 14세 때도 빠지지 않았다. 1672년과 1674년에 각각 건설된 두 개의 개선문도 루이 14세의 전승기념 의미를 담아서 세워졌다. 이 두 개의 문은 샤를 5세의 성벽을 허물 때 기존에 있던 성문들 자리에 나란히 지어졌다. 생드니 길은 왕의 행차가 지나가는 중요한 길이었다. 왕이 렝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마치고 진정한 왕이 되어 자신의 왕궁 루브르로 돌아오는 곳도 이 길이었다. 그리고 왕이 루브르에서 죽으면 왕의 장례식 행렬이 길을 지나서 생 드니 바질리카로 간다.   


12개의 길이 모이는 에뚜왈 광장에 세워진 개선문(왼쪽), 1672년에 세워진 생 드니 문(가운데), 2년뒤 세워진 생 막땅 문(오른쪽)  


그리고 파리에 있는 왕궁 중에서 이태리 양식이 가장 잘 반영된 궁은 바로 룩상부르그 궁이다. 지금은 상원 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이 궁은 메디치가에서 앙리 4세에게 시집온 마리 드 메디치 여왕이 지은 궁이다. 룩상부르그 정원에서 메디치

앙리 4세의 첫 번째 아내, 마고 여왕은 아이를 낳지 못하여 이혼당하고, 왕은 돈 많은 두 번째 아내를 얻는다.

마고 여왕은 앙리 2세와 까뜨린 드 메디치의 딸이다. 이태리의 르네상스가 프랑스에 유입되는 시기에 메디치가의 딸들이 프랑스의 왕비가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예술가들은 로마에서 수학하는 것이 필수 코스처럼 여겨졌고, 프랑스의 르네상스 전성기도 프랑수와 1세가 많은 이태리의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불러와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지원하며 꽃 피운다.

그런 상황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프랑수와 1세의 후원을 받고 프랑스로 오게 되며, 프랑스 루아르 지역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묻히게 되는 것이다.


섭정 시기인 1615년부터 마리 드 메디치가 이태리 양식의 룩상부르그 궁전을 짓는다(왼쪽). 룩상부르그 공원에 있는 메디치 분수(오른쪽)는 여왕이 이태리 예술가에 주문했다.


로마가 파리를 식민지로 만들고, 그들의 도시 건축물이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 파리의 현재가 되고 있다. 이후 르네상스 시기에 프랑스의 왕들은 이태리의 예술가들을 초대하고, 이태리의 여인들과 결혼하며 프랑스 왕실은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면 까뜨린 드 메디치가 데려온 요리사들은 아이스크림이나 이태리의 음식들도 가져왔고, 프랑스 식탁에서 포크를 사용하게 된 것도 그녀의 영향이다.

이후 프랑스의 왕들은 로마의 황제를 자신의 모델로 삼아서 예술 작품 속에서 황제로 재탄생된다. 바로크를 거치며 프랑스의 고유한 양식을 만들어 가긴 하지만 시민혁명을 거치고 나폴레옹이 제정을 연 뒤에도 로마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왕실뿐만 아니라 교회도 당연히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음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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