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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Aug 11. 2016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속담으로 한옥 배우기



1.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있을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 실제 어떤 일이 있기 때문에 말이 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굴뚝@Esteban Chiner





어려서 보았던 만화영화나 동화의 영향이었겠지만, ‘페치카’ 또는 ‘벽난로’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하얀 눈이 오는 겨울밤 따뜻한 불이 피어오르는 벽난로 주변에 온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있고, 흔들의자에 걸터앉아 익숙한 솜씨로 뜨개질을 하시는 할머니는 코끝까지 내려온 돋보기 너머로 손자들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시는 그런 모습 말이다. 참으로 정감 어린데다 벽난로가 없었던 우리 정서로는 이국적 느낌의 그 장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


서양 사람들이 주택에 주로 설치하는 난방장치인 페치카는 원래 러시아 말이다. 추운 나라인 러시아에서 발달한 난방장치인데, 이게 유럽으로 건너가 자리 잡으며 고유 명칭인 '페치카(Pechka)' 그대로 불리게 되었다. 세계를 주름잡았던 자존심 센 유럽 사람들이 왜 '페치카'라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변방이었던- 러시아의 말과 난방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그들에게 페치카는 왜 그렇게 획기적인 난방장치로 각광을 받았을까? 


독일에는 ‘3대 악’이란 속담이 있다. 첫째는 비 새는 지붕, 둘째는 집안에 가득 찬 연기, 셋째는 바가지 긁는 아내가 그것이다. 속담이란 오랜 세월 동안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생활상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비 새는 지붕과 집안에 가득 찬 연기는 당시 독일의 보편적 현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지붕에서 비가 샜을까? 그리고 집안에는 왜 연기가 가득했을까?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지 않은 현상이라 얼른 납득이 되지 않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오래전 인류가 살았던 움집을 생각해 보자. 대개 움집은 가운데에 불을 피운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원뿔형으로 생긴 움집의 내부에서 불을 피우면 그 안에 연기가 가득 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눈이 매워 뜰 수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연기를 내보내려 했을 것이다. 또한 불길이 위로 치솟아 만약 지붕에 닿기라도 하면 자칫 화재의 위험도 있었을 테니 화재를 예방하고 연기를 내보낼 생각으로 맨 위쪽 지붕을 뚫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 구멍으로 연기가 일부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굴뚝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위를 뚫어 놓았다고 할지라도 집안에 연기가 차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비가 오면 뚫린 구멍으로 빗물이 들어오니 집안 곳곳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주거의 모습은 유럽에서 돌로 집을 지은 후 구멍의 위치와 형태가 달라졌을지라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비새는 지붕과 집안에 가득 찬 연기는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현상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연기는 일종의 폐기물이다.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온 집안 내부 벽에 시꺼멓게 그을음이 생기게 하니 집안을 청소하고 치우는 여인들의 심기가 어땠을까? 평소의 생활이 이러하니 주부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당연지사 일을 마치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으며 화풀이를 했음에 틀림없다. 이를 당하는 남편 입장에서도 역시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3대 악'이라는 속담이 생겼을까! 

전통 페치카의 모습 @kyryll sobolev






그런데 러시아의 페치카는 자체 굴뚝이 있어서 연기를 깨끗하게 해결해 버리고, 지붕에서 물 샐 일도 없었으니 얼마나 획기적인 장치였겠는가? 이런 선진기술을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원래 러시아의 페치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벽속에서 불만 피우는 그런 형태의 난방장치가 아니었다. 벽에 붙어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실내로 들어와 있는 구조로 설치되었다. 게다가 페치카는 복합 장치로써 난방과 조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는 러시아의 부족한 연료문제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무릎 높이에서 불을 피우면 그 불을 이용해 허리 높이에서 음식을 조리한다. 그리고 그 열로 난방까지 하는 것이다.(우리의 한옥도 아궁이에 가마솥을 걸고 난방과 조리의 기능을 함께 수행했다.) 그런 페치카가 유럽의 집집마다 보급되었는데,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은 페치카를 설치하기 이전부터 이미 별도로 있었을 테니, 요리를 위한 기능이 배제된 채 난방만 하는 장치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유럽식 페치카는 거실의 한쪽 벽에 설치되어 불을 피우는 난방장치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굴뚝은 벽과 함께 설치했다.


불이 활활 잘 타오르며 연기가 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따라서 페치카 또는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당연히 굴뚝으로 연기가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굴뚝으로 연기가 나가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때던 불이 꺼졌거나, 다른 곳으로 연기가 새는 경우다. 불이 꺼졌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른 곳으로 연기가 새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경우다. 우리나라 산업발전 시절에는 주로 연탄을 땠는데, 처음 연탄에 불을 붙이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시간이 되어 다 타버린 연탄을 갈 때면 구멍을 잘 맞춰 매우 신중하게 연탄을 갈곤 했다. 또한 연탄불을 붙인 후에는 굴뚝으로 연기가 잘 빠져나가고 있는지를 꼭 확인해야 했다. 연탄은 처음 불을 붙이는 동안 일산화탄소가 많이 발생했는데, 그 가스가 굴뚝으로 나가지 않으면 실내 어딘가로 새 들어오는 경우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남산한옥마을 아궁이@hangidan


나무나 연탄 등 투박하고 거친 연료를 주로 사용하던 시절의 부엌은 신발을 신고 출입하던 곳이었다. 불을 다루는 일과 더불어 음식을 준비하거나 쓰레기 등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발을 보호하는 신발을 신는 것은 당연했다. 아파트 생활만 한 사람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한겨울 추위에 불을 지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쌩쌩부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부엌의 바깥문을 닫은 채 아궁이에 연탄을 넣고 불을 땠는데, 점화 초기에는 배출되는 가스가 무거워 아래로 깔리며 점점 쌓이게 된다. 이때는 춥더라도 바깥문을 열어 강제로 환기를 시켜야 하고, 잠시 후 불이 활활 타오르면 그때서야 연기는 위로 솟으며 굴뚝으로 나가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반드시 지켜본 후 잠을 청해야 했다. 그런데, 연탄불을 지피자마자 부엌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잠들게 되면 만의 하나라도 가스가 새들어오게 될 경우 불행하게도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지난날 많은 이들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죽음은 자신의 방심 또는 관리 소홀이 원인일 수 있지만, 당시 허술하게 지어져 틈새가 많았던 건축물도 사고 발생에 한몫한 것이다.




연기는 결국 열을 생산하고 난 이후의 폐기물이다. 굴뚝으로 이 폐기물을 버리는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은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나는 그 집이 사람을 살리고 피해를 주지 않는 건강한 집이로구나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불을 때면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불을 땠음에도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다면 그 집이 더 문제다. 집의 건강상태가 매우 불량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연료가 좋아져서 도시가스나 프로판 가스는 연기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부산물인 또 다른 폐기물 가스는 눈에 보이지 않고 미량일지라도 반드시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런 가스 역시 사람에게 해로우니 집안에 남아 있지 않도록 환기를 잘 시켜 배출해야 한다.


방귀나 대소변은 사람의 폐기물이다. 더럽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오는 게 감사한 일이다. 불을 때지 않은 집 굴뚝에 연기가 날 수 없는 것처럼, 먹지 않으면 대소변도 없다. 불을 땠기 때문에 연기가 나듯, 먹었기 때문에 우리 몸에서 폐기물도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이 자신의 폐기물을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처리하며 살고 있다면 그게 큰 은혜이고 축복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문득문득 그 평범한 삶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지난 20년 동안 병마에 고생하셨던 나의 장인어른은 이제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살아 계시는 동안 그 옆에서 대소변은 물론 온갖 수발을 다 드셨던 장모님이 더 애처로웠다. 사람이 스스로 먹고 대소변도 잘 처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고맙고 멋진 일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도시에서 연기 나는 굴뚝을 찾기 힘든 시대가 됐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 또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도 있다. 아파트 각 세대의 보일러실에서 수평으로 슬쩍 내밀어 있는 스테인리스 연통도 굴뚝이라면 굴뚝이니까. 운치 없이 내민 연통일지라도 폐기물을 잘 처리하고 있다면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살면서 언젠가는 멋들어진 굴뚝이 있는 집을 짓고 싶은 꿈을 누구나 꿀 것이다. 꿈꾸는 모든 이가 꼭 그런 삶을 살기 바라며 그 꿈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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