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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Sep 10. 2015

터를 닦아야 집을 짓지

속담으로 한옥 배우기


기초 작업을 해야 그 다음 일을 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터를 닦아야 집을 짓지’라는 속담은 먼저 땅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그 위에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반드시 필요한 선행 작업을 해야 그 다음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건축은 사람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그 안에서 사람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건축은 반드시 '안정성'이 있어야 한다. 안정성이란 변하지 않는 성질을 말한다. 형태나 구조는 물론이고 시간에 의해서도 잘 견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려면 집을 지으려는 땅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만일 땅에 안정성이 없다면 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이 서서히 가라앉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짓기 전에 먼저 그 집이 들어설 땅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건축자재도 안정성이 있어야 한다. 안정성이 없는 재료를 사용한다면 사람이 살면서 심각한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 종이로 집을 짓지 않는 이유는 종이가 안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비 온 후 무너지는 집에 사람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일본의 건축가 '시게루 반'은 종이집을 짓기로 유명하다. 재난이 발생한 지역에서 신속하게 거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종이집을 만든다거나 이벤트를 위한 파빌리온을 지은 후 해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짓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종이는 우리가 아는 일반 종이가 아니라 집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특수하게 만들어진 종이다 보니 이 역시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특수한 목적이 아닌 경우 건축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이미 안정성이 있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중세 유럽의 건축물들은 대개 '돌'로 지어졌다. 돌을 쌓아서 만든 건축물이니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까?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이 흐른 현재까지 튼튼하게 잘 서있는 이유는 지반의 '안정성'이 좋기 때문이다. 땅속이라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만, 실제로 그 건축물들이 서 있는 땅속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터를 든든하게 닦는 작업이 되어 있고, 그중 일부는 상당한 양의 말뚝들이 박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작업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감에도 실제 건축물이 지어진 이후엔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그 많은 돈과 시간을 땅 속에 쏟아 붓는 건축주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성경에도 '반석 위에 짓는 집'이라는 말이 있다. 지반이 반석 즉 암반층으로 되어 있으면 아무리 무거운 돌 건축이 올라가도 안정성이 높고 땅속에 말뚝을 박는 비용이 들지도 않으니 건축을 위해 준비한 돈을 눈에 보이는 지상의 건축물에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큰 건물을 짓는 건축주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그래서 돌이 주재료인 서양 건축에서는 이런 암반층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에 비해 한옥은 돌 위에 짓는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삼척의 '죽서루'처럼 풍광이 뛰어난 곳의 정자는 가끔 암반 위에 지어졌지만, 이런 특수한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한옥은 평지의 적당한 땅을 택해 잘 다진 후 그 위에 지어졌다. 오히려 소위 '명당'을 찾기 위해 '지관'이라는 풍수지리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터 잡는 일을 매우 신중하게 했다. 서양의 건축물이 돌로 된 것과는 달리 우리 한옥은 주요 구조부가 모두 나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벽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황토로 만들어졌다. 유럽의 돌 건축물과 비교하면 매우 가벼운 셈이다. 그러니 우리 한옥을 지을 때는 위치만 좋다면 토질은 거의 가리지 않는 편이다. 반석이건 무른 땅이건 별로 상관하지 않고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건축물이 놓일 지반, 특히 기초가 놓일 부분을 잘 다져 단단하게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이를 지정이라 한다.

한옥에서 지정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판축지정', '입사지정', '적심석지정', '장대석지정' 등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말뚝지정이 많지 않은 이유는 말뚝을 높은 곳에서 박을 수 있는 여러 장비와 보조 장치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사실 한옥은 높이 짓는 건축이 아니므로 돌을 쌓아서 만드는 수직적 공법이 발달한 유럽에 비해 말뚝을 박는 장비가 덜 발달했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산업과 문화의 기반이 농사에 있었기 때문에 땅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에 적합한 형태와 기술이 훨씬 더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지정의 목적은 기초하부를 단단하게 해 땅이 건축물의 무게를 잘 견디도록 하는 것이다.

한옥을 지을 때 가장 보편적인 지정은 '판축지정'이다. 초석이라 부르는 기초가 놓일 부분의 무른 흙을 파내고 석회나 마사토(화강암이 부식된 돌가루처럼 생긴 흙)를 넣고 여러 차례 다지는 방법이다. 충분히 다져서 밀도를 높여 단단하게 하고, 그 위에 또 다시 마사토를 부어 넣고 또 다진다. 이렇게 수차례 반복하여 여러 켜의 지정을 만드는 것이 '판축지정'이다. 이때 다지는 도구를 '달고'라 한다. 달고는 보통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작업하는 도구로써 나무로 만들었으면 '나무 달고', 돌로 만들었으면 '돌 달고'라 부른다. 


무른 흙을 파내버리고 그 자리에 모래를 넣고 다지는 방법도 있다. 이를 '입사지정'이라 부른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튼튼하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편견이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반석은 건축물의 무게를 잘 견디는 지내력이 훌륭하다. 즉 수직력인 중력에 잘 견디는 것이다. 모래도 바닷가에서처럼 외부 힘에 의해 쓸려나가지만 않는다면 고정된 곳에서는 매우 우수한 지내력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 흙을 파내고 그릇처럼 움푹한 곳에 모래를 부어 넣고 다지면 지정의 역할을 훌륭하게 하게 된다.


모래 대신 적당한 크기의 적심석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심석지정'이다. 채집이 쉬운 적당한 크기의 돌을 고르게 집어넣고 잘 다지면 된다. 여기까지가 보통의 경우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지정방식이다. 그러나 궁궐이나 사찰처럼 한옥의 규모가 아주 큰 경우는 적심석대신 큰 돌을 다듬어서 지정을 만들기도 했다. 이를 '장대석지정'이라 한다. 장대석 지정은 비용 면에서도 상당히 비싼 공법이었다. 그래서 검소한 생활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에는 일반 서민이 개인의 건축을 위해서는 이 공법을 사용할 수도 없었지만, 실제로 지어지는 건물의 무게가 서양의 돌 건축에 비하면 훨씬 가벼운 편이라 굳이 이렇게 비싼 돈을 들여가며 지정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터를 닦을 때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는 비 온 후 물이 잘 빠지도록 해야 한다. 

마당에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수가 잘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당에 까는 흙은 점성이 낮고 물을 잘 흘려보내는 성질이 있는 마사토를 사용한다. 


둘째, 성토한 자리를 피한다. 

만약 경사지에 집을 짓게 된다면 어느 정도는 흙을 파내게 된다. 이를 '절토'라고 한다. 또 반대로 파낸 흙을 어딘가에 부어 바닥을 메우거나 높이는 것을 '성토'라고 하는데, 이런 성토지반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가라앉게 된다. 흙의 자체 무게 때문에 서서히 눌리기도 하지만, 비가 오면 흙 입자 사이의 공기가 빠져나가며 조직이 점점 치밀해진다. 그 상태로 10년  이상되면 이제 거의 변화가 생기지 않아 그 위에 집을 지어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제 막 성토를 했거나 성토한지 오래되지 않은 땅은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잘 다져도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침하하게 된다. 따라서 집을 지을 자리는 반드시 원래의 땅이거나 절토한 곳을 택한다. 


셋째, 외부의 물이나 흙이 대지 내로 흘러들어오지 않게 한다. 

자기 대지 내의 물이 밖으로  배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대지나 도로의 물이 자신의 땅으로 흘러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평지의 경우 그럴 염려가 거의 없지만, 경사지는 얘기가 다르다. 뒤편 높은 곳에서 지속적으로 물이 흘러내릴 수 있고 토압에 의해 흙이 밀려 올 수도 있다. 그런 조짐이 보이는 곳은 자칫하면 산사태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이를 완충시키기 위해 주변에 둔덕을 만들고 배수로를 넓게 파거나 석축 또는 옹벽을 쌓기도 한다. 



터에 관해서는 오래된 한옥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새로 짓는 집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요즘은 대부분 토목 작업을 마친 후 대지를 분양하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이 필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대지를 골라서 집을 짓는 경우에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부터 세밀한 정성을 기울여야 좋은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을 잘 지어야 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정성껏 집을 짓고 나면, 그 집이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게 된다. 성공하는 집 짓기의 시작은 땅을 골라 다지는 일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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