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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Sep 15. 2015

무른 땅에 말뚝 박기

속담으로 한옥 배우기


 

1. 몹시 하기 쉬운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 세도 있는 사람이 힘없고 연약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학대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왜 무른 땅에 말뚝을 박았을까?           


‘무른 땅에 말뚝 박기’는 몹시 손쉬운 일 또는 어떤 일을 할 때 아무 힘 안 들이고 아주 쉽게 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 사용한다. 때로는 권력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학대할 때 쓰기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일은 생기곤 한다. 말뚝이란 땅에 박기 위하여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몽둥이를 말한다. 무른 땅에 말뚝을 박는다면 그 말뚝이 오랫동안 고정된 채로 있을 수가 없다. 박아 놓은 땅에 힘이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그 말뚝이 저절로 쓰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런 곳에 말뚝을 박았을까? 그리고 무른 땅은 어디였을까?


요즘 도시에서는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으로 포장을 잘 해놓았기 때문에 맨땅 밟기가 어렵지만,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포장된 길이 드물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질퍽거리는 길을 걸었고, 신발 속으로는 물이 들어오기 일쑤였다. 우산도 변변치 않아서 바지 종아리까지는 젖는 게 다반사였고, 그나마 흙물이 튀지 않도록 무척 신경 쓰면서 조심스럽게 걷곤 했다. 그렇게 비가 많이 오거나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으면 땅은 물러진다. 흙의 입자 사이로 물이 스며들기 때문에 뭉치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을 골라서 일부러 말뚝을 박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물이 고인 땅, 즉 무른 땅은 바로 ‘논’이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논에도 봄이 찾아오면 흙이 녹기 시작한다. 봄기운이 완연해지고 땅이 녹으면 그제야 흙을 뒤엎는다. 눌려 있던 흙 속에 신선한 공기를 넣어주고 단단하게 뭉쳐있던 덩어리를 잘게 부수어 흙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한편 농사를 지은 땅에는 영양분이 부족해지기 마련이다. 이를 지력이 약해졌다고 표현한다. 지력이 약한 흙으로 다시 농사를 지을 경우 소출이  부실해질 수 있으므로 새해 농사를 위해 지력의 손실이 없었던 땅 속 깊이 있던 흙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규모가 큰 논이나 밭은 트랙터를 이용하기도 하고 작은 땅은 사람이 직접 삽으로 뒤집기도 한다. 나도  수년 간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직접 삽질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퇴비를 뿌려 밑거름을 주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오월이 되면 논에 물을 채우고 모판에서 자란 벼를 논으로 옮겨 심는 작업이 시작된다. 물이 가득한 논은 이미 물러질 대로 물러져서 부드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이런 땅에 말뚝을 박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논에 말뚝을 박을 일이 있었을까? 있다. 모내기를 할 때다. 벼의 줄을 맞춰 심기 위해 논의 양쪽 끝에서 줄을 팽팽하게 당겨 주는데, 이를 못줄이라 하고 그 줄을 말뚝에 묶어 논바닥에 박는다. 벼를 다 심었으면 그 말뚝을 뽑아 다시 다음 자리에 눌러 박는다. 이렇게 말뚝을 옮겨가는 것이다. 줄을 맞춰 심는 이유는 관리하기가 편할 뿐 아니라, 추수 때 더 수월하게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을마다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힘 좋은 남정네들과 일 잘하고 부지런한 아낙들은 물이 가득 찬 논에서 허리 숙여 벼를 심지만, 못줄잡이는 경험 많은 노인들이 주로 한다. 못줄잡이의 구령과 징소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논에 모를 심는다. “자~ 다 심었으면 넘어간다.” 못줄잡이의 득의양양한 외침 소리에 모를 심는 이들은 “잠깐만~” 혹은 “조금만 더~”를 외치며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종일 땡볕에서 깔깔대며 즐거운 노동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일손이 부족한 마을에서는 어린이나 가장 일 못하는 사람이 못줄을 잡기도 했다. 힘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라 할지라도 물이 들어 찬 무른 논에 말뚝을 박았다 뺐다 하는 정도의 일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일은 종일 수고하며 허리도 못 편 채 모내기를 하는 이들에 비하면 일도 아닌 것이다. 이 상황이 바로 ‘무른 땅에 말뚝 박기’다. 


집을 지을 때도 땅에 말뚝을 박는 경우가 있다. 

집을 짓고자 하는 땅이 단단하지 않으면 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가라앉게 된다. 지내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집이 놓인 땅이 가라앉는 현상을 ‘침하’라 한다. 똑 같이 내려가면 그나마 낫지만, 실제로는 무르거나 약한 쪽이 더 빨리 기울어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바닥에 경사가 느껴질 정도로 비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부동침하(不動沈下)’ 또는 ‘부등침하(不等沈下)’라고 하는데, 이런 집에서는 평형감각이 혼란을 느끼고 어지러워서 살 수가 없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애초에 땅을 단단하게 다지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도 있지만, 심각하게 무른 경우 말뚝을 박거나 약한 흙을 파낸 후 더 단단한 흙으로 채우기도 한다. 이를 ‘지반개량’이라고 한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기초보다 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건축물의 기초가 놓이기 전 땅 속을 먼저 단단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지정'이라고 한다. 지정을 만드는 원리는 땅, 즉 흙의 밀도를 높여서 단단하게 하는 방법과 무른 흙을 파내고 그곳에 더 단단한 재료를 채우는 방법이 있다. 흙의 밀도를 높이는 대표적인 방법이 말뚝을 박는 것이다. 이를 '말뚝지정' 또는 '파일지정'이라 한다. 말뚝을 박으면 원래 말뚝이 박히기 전 그 위치에 있던 흙이 말뚝을 박으면서 말뚝의 부피만큼 옆으로 밀리게 된다. 말뚝을 여러 개 박으면 박을수록 옆으로 밀리는 흙의 밀도는 점점 높아지게 된다. 건축물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필요한 말뚝은 많아질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단단한 나무를 땅속에 박아서 지정을 만든 경우도 있지만, 요즘에는 나무 말뚝 대신 콘크리트 말뚝을 주로 사용한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수상도시 베네치아도 바다의 무른 땅에 수없이 많은 나무 말뚝을 박은 후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얘기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지반이 조금씩 침하되고 있어서 비가 많이 오거나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지면 산마르코 광장 전체가 물에 잠기곤 한다. 그래서 지금도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섬의 곳곳에서 지반개량을 위한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관광지 피사의 사탑도 지정의 부실 때문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건축과정에서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했음에도 공사를 강행했는데,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종탑이다 보니 큰 무리 없이 유지될 수 있었고 오히려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최근 기술이 발달하다 보니 땅속 지정을 보강해서 기울어진 탑을 바로 세우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의 주민들이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 이를 반대하고 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무른 땅은 ‘터’로써 가치가 없다. 터의 위치를 바꿀 수 없다면 그 땅의 성질을 바꾸면 된다. 말뚝을 박아서  무가치하던 곳을 훌륭한 가치를 지닌 곳으로 바꿔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 무른 땅에 말뚝을 많이 박을수록 땅이 점점 단단해지듯이 우리의 인생도 비슷하다. 천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순수 무구한 사람도 있지만, 마음에 뾰족한 말뚝이 수도 없이 박혀 있는 사람도 있다. 천혜의 조건으로 암반층을 가진 이는 그 위에 크고 훌륭한 건축을 세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부드러운 땅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인생 건축을 위해 그 터에 말뚝을 박아 단단하게 해야 한다. 뾰족한 말뚝이 땅에 박힐 때마다 흙이 옆으로 밀리는 것은 흡사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다. 통증이 밀려오겠지만, 그런 과정을 수도 없이 거친 후라야 비로소 건축을 할 수 있게 된다. 말뚝으로 가득한 그 터 위에 육중하고 거대한 건축이 거뜬히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사람에게 받는 상처로 인해 땅에 말뚝이 박히듯 마음에도 고통을 주는 말뚝이 박히기도 한다. 마음의 말뚝이 자신에게는 큰 고통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것을 견뎌 이겨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깊고 넓어지게 된다. 


건축에만 지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필요하다. 

인생을 잘 짓고 싶은 사람은 단단한 지정이 있어야 한다. 즉 아픔과 상처가 많을수록 그 사람의 인생 지정도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그 위에 세워진 인생 건축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에게까지도 쉴 곳을 제공하게 된다. 오래전 구창모 씨가 불렀던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는 결국 상처와 고통이 인생의 지정을 더 단단하게 한다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오늘은 그의 감미로운 노래를 듣고 싶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구창모

한번쯤 겪어야만 될 사랑의 고통이라면

그대로 따르겠어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바라는 것도 없어요 모두 다 주고싶어요

소중한 것은 사랑뿐 그밖에 뭐가 있나요


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고통을 안겨줬어요

진실을 감추며 외면한 말없이 돌아선 이별

사랑은 약한 마음에 상처만 가득 남기고

아픈만큼 성숙해지는 진실을 알게했어요


한번쯤 겪어야만 될 사랑의 고통이라면

그대로 따르겠어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바라는 것도 없어요 모두 다 주고싶어요

소중한 것은 사랑뿐 그밖에 뭐가 있나요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모든게 끝난것처럼

마음은 둘 곳을 모르고 너무나 슬픈 생각뿐

얻고 싶었던 사랑을 끝내는 잃어버린채

아픈만큼 성숙해지는 진실을 알게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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