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틱스>, 이미지가 사랑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

by archiveko

텅 빈 텍스트, 이질적인 공간과 자연의 인서트 속에서 <애틀랜틱스>의 가장 명확한 이야기는 영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뭔가 이상하고 기묘한 진행 방식이다. 청년들이 부당한 임금체불을 말하며 카메라는 다소 다큐멘터리적인 형식으로 인물들의 얼굴을 쫓는다. 이 과정에서 <가버나움>처럼 극과 현실의 경계선상에 있는 영화로 느껴지지만 이들의 방향은 갑자기 <열대병>의 모호함을 따라간다.


이 영화를 어떤 장르로 특정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굳이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건 공백의 텍스트 속에서 <애틀랜틱스>는 지속적으로 병치되는 이미지들로 새로운 영화의 방향성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사회적인 메시지로 이어질 것 같은 이야기는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띄며 진행된다. 하지만 이 사랑이야기는 지속되지 못한다. 만남을 기약한 술레이만과 그의 친구들은 스페인에 가기 위해 바다로 떠났고 돌아오지 않는 이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틀랜틱스>의 서사는 매우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곳곳이 비어있다. 놀랍게도 영화는 이 지점을 이미지의 유려함을 통해 확장시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술레이만과 아다가 바닷가 앞에서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있다. 키스를 하던 도중 아다는 기척을 듣고 그날 밤 클럽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 속에서 영화는 낮의 파도와 밤의 파도를 병치시킨다. 어쩌면 술레이만의 부재를 미리 예견하며 앞으로 사용될 이미지들을 구축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파도의 일렁임을 씬과 씬 사이에 반복적으로 집어넣으며 술레이만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왜 영화는 술레이만을 놓지 못하는가.


어쩔 수 없이 정략결혼을 하게 된 아다의 집에 불이 나게 되고 그날 밤 누군가 술레이만을 봤다는 증언이 있게 된다. 순식간에 술레이만은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더욱 모호한 인물로 존재하게 되며 방화의 용의자가 돼버린다. 하지만 이 불조차 촉발한 게 없다고 판명되며 모호함을 더욱 짙게 만든다.

불은 어떻게 난 것인가? 술레이만은 살아있는가? 이 미스터리함은 경찰인 ‘이사’에게로 넘어간다. 아다를 공범으로 지목하며 이사는 술레이만의 행방을 캐묻는다. 그러던 중 갑자기 땀을 흘리며 도로에 쓰러진다. 다음 씬에서 역시 땀을 흘리는 판타의 모습이 보이고 카메라는 다시 파도의 일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정확히 영화의 중반 지점에서 하얀 눈을 가진 망령들이 등장한다. 다시 의문이 시작된다. 이 망령들은 무엇이며 누구인가?


<애틀랜틱스>는 이들의 정체를 생각보다 빠르게 알려준다. 오프닝에 등장했던 청년들. 곧 술레이만의 친구들,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여성의 몸을 빌려 다시 임금체불을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집에 불을 지를 것이라고 말하며 카메라는 바다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 건조한 도로에서 땀을 흘리며 쓰러지는 인물들(망령이 되어가는)의 이미지를 반복시켜나간다. 이 과정에서 역시 한 가지 모호성이 생긴다. 망령들은 아다의 친구들, 여성의 몸을 빌린다는 것인데 정작 아다는 망령이 되지 않고 이사, 곧 남성의 몸을 빌린 망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애틀랜틱스>가 놓쳤던 사랑의 텍스트를 메꾸는 방식이다. 망령이 된 술레이만의 친구가 말한다. “노동법을 개션하려 스페인에 가려했지만 파도가 몰아쳤고 우리는 떠밀려 내려갔다. 마치 우리가 짓는 건물처럼 배는 무너졌다. 술레이만은 너에게 작별인사를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린 전부 하지 못했다.” 이 청년들이 망령의 모습으로 찾아간 것은 노동의 끝을 메꾸기 위해서이다. 술레이만은 ‘남성’(이사)의 몸을 빌려 아다에게로 간다. 그가 놓쳤던 작별인사와 사랑을 채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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