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포근하게 만드는 마법

집학사전-조명

by 이재준
"빛은 건축의 영혼이다. 빛 없이는 공간도 없고, 분위기도 없으며, 삶도 없다."

- 루이스 칸, 『빛과 그림자』


어린 시절, 엄마가 하나씩 불을 켜는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가 퇴근하고 집에 오실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먼저 거실 형광등, 그다음 부엌 백열등, 마지막으로 대문의 작은 등. 그 순간 우리 집은 어둠 속에서 따뜻한 빛의 섬으로 변했다. 밖에서 보면 우리 집 창문마다 불빛이 스며 나와, 마치 집 전체가 미소 짓는 것 같았다. 마당에 앉아 있으면 창문으로 비치는 불빛과 집 뒤켠으로 노을 지는 모습이 그렇게 좋았다.


건축 조명은 실내의 시각환경을 위해 조도계산, 전력소비, 설치방법등을 기초로 '적절한 밝기로 시각 환경의 쾌적성을 도와주는 것'이 조명의 목적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집덕후로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조명의 진정한 역할은 공간에 감정을 불어넣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같은 방이라도 조명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의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첫 자취방에서 맞은 밤은 을씨년스러웠다. 방 중앙에 달린 형광등 하나가 모든 것을 환하게 비췄다. 그 빛 아래서는 아늑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마치 사무실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작은 스탠드를 하나 샀다. 침대 옆에 놓고 책을 읽을 때 켜는 조그만 불빛. 그 따뜻한 빛 아래에서야 비로소 집다운 느낌이 들었다.


조명은 시간을 만든다. 아침에는 밝고 차가운 빛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같은 전구라도 시간대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낮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조명이 밤이 되면 공간의 주인이 된다.


tempImageNHzl4p.heic 색온도(K)는 동틀 때부터 해질 때까지의 햇빛을 따라간다. 3000대는 백열등, 6000대는 아주 밝은 형광등빛이다


결혼 후 처음 꾸민 집에서 나는 천장에 달린 형광등을 모두 없앴다. 조명을 하나하나 선택하면서 공간마다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거실에는 은은한 간접조명, 침실에는 따뜻한 침실등, 서재에는 밝은 독서등. 전기공사를 하지 않고 모두 간접조명 방식으로 설치했다. 공간마다 다른 성격의 빛을 주었더니 집 전체가 달라졌다.


조명은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밝은 형광등 아래서는 활동적인 대화가, 어두운 촛불 아래서는 친밀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같은 사람이라도 조명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부드러운 백열등 아래서는 모든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더 따뜻하게 보인다.


외국에서 경험한 조명 문화도 인상적이었다. 유럽의 오래된 집들에서 본 샹들리에, 북유럽의 심플한 펜던트 조명, 일본의 정갈한 화지 조명. 나라마다 조명에 대한 철학이 달랐다. 서양에서는 조명을 장식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고, 동양에서는 조명을 분위기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조명에는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어떤 빛을 보면 특정한 순간이 떠오른다. 할머니 집의 어둠침침한 백열전구, 대학교 도서관의 차가운 형광등(우리나라만 그러하다), 첫 데이트에서 갔던 카페의 은은한 조명. 지하 소극장에서 느꼈던 다채로운 조명. 빛은 그렇게 기억의 매개체가 된다.


조명을 선택할 때 나는 항상 '온기'를 중시한다. 차가운 빛보다는 따뜻한 빛을, 직접조명보다는 간접조명을 선호한다. 집은 휴식하는 곳이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밝은 빛은 긴장감을 주고, 너무 차가운 빛은 거부감을 준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조명은 여전히 자연의 빛이다. 촛불, 벽난로의 불, 등유램프의 빛. 이런 빛들은 전기 조명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특별한 온기가 있다. 살아있는 빛, 숨 쉬는 빛이다.


조명은 집의 성격을 결정한다. 밝고 화사한 조명의 집은 활동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을, 어둡고 은은한 조명의 집은 차분하고 내향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래서 조명을 선택할 때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좋은 조명이란 가장 밝은 조명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조명이다. 그리고 그 적절함은 기준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사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조명은 그렇게 집과 사람을 이어주는 더할 나위 없는 다리가 된다.


tempImageXMYLDt.heic 간접조명이 눈에 좋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집에는 직접조명을 주로 쓴다. 그것도 너무 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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