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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Feb 07.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  유배지 송시열 적거터

유배지 乇羅탁라 그 열두번째 장소, 尤庵宋時烈 우암송시열 적거터

송시열 적거터는 제주시 칠성통 골목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주자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이 적거했던 유허지다.

노론이 영수였던 우암은 제주에 유배되어 이곳에 적거하는 동안 우암은 귤림서원과 경천암에 제사를 지내고 문의통정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거 3개월 만에 다시 의금부에 구인되어 가다가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송시열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 은진. 호 尤庵우암(허물로 가득 찬 암자)

송준길, 송규렴과 함께 가문을 빛낸 Bic3 송宋.


1633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1635년 봉림대군의 사부가 된다.

우암은 왕을 호종해 남한산성으로 피난.

1637년 결국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 장남 소현세자와 둘째 봉림대군 인질로 청나라로 끌려가고 우암은 고향 懷德회덕(큰 덕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고장)으로 낙향한다.

1645년 8년 만에 돌아온 소현세자 병사하고 둘째 봉림대군이 1649년 제 17대 왕 효종 등극하자 우암을 장령(掌令 지금의 감사관)으로 등용한다.

우암은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인 淸西派청서파(의리,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

인조반정에 가담해 공을 세운 서인세력인 攻西派공서파(공훈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

김자점이 영의정에 오르자 다시 낙향한다.

다음 해 김자점 파직되고 우암은 다시 한양 입성한다.

서울 종로구 명륜1가 5-99. 이 우암 송시열 집터는 서울유형문화재 제57호.


세자 스승인 進善진선 등용되고.

1651년 우암이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하자 다시 낙향.

1654년 소제동 방죽가에 杞菊亭기국정(구기자와 국화로 뒤덮인 정자) 건립하고 후학 양성에 나선다.

1658년 이조판서 등용.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 추진하다 이듬해 효종이 죽자 북벌계획 중지되고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상복을 1년간 입어야 할까, 3년을 입어야 할까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우암은 부모가 장자에 대해서는 3년 상이고 차자 이하의 아들에게는 1년 상이다.

효종은 둘째라 우암이 세를 얻어 남인 전부 제거되고 이제 우암은 서인의 영수가 된다.

1660년 우찬성이 되고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다시 낙향한다.

1668년 우의정이 되나 좌의정 허적 과의 불화로 또 낙향.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

1674년 효종의 왕후 인선왕후 별세로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다시 붙었다.

우암은 둘째의 부인이니 大功說대공설(9개월)이 맞다고 주장하지만 남인의 朞年說기년설(1년)이 승리하며 서인은 몰락하고 우암은  68세에 함경남도 덕원으로 유배된다.

1680년 庚申大黜陟경신대출척(특정 정파의 힘이 너무 강해지면 꼬투리를 만들어 관료들을 전부 내치는 것)으로 남인은 실각하고 우암은 중추부영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奉朝賀봉조하(종2품의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가 되었다.

벼슬길에 들락날락하길 28번.


고향에 새로운 서당 건립하고 현판을 걸었다.

남간정사. 대전시유형문화재 제4호.

주자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양지바른 곳을 졸졸 흐르는 개울)에서 따 온 거다.


1689년 숙종은 후궁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지만 우암은 중전마마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한다고 극렬 반대하다 거제도로 유배된다.

1704년 후학 윤도원 우암 유배터 거제면 동상리 367-3에 盤谷반곡(넓고 깊은 골짜기)서원 건립하고 우암을 모신다.

이제 제주도 이배되는 나이 이미 83세.

제주 지역에서는 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나이 83세에 제주도로 유배된 송시열은 약 100여 일 동안 산짓골 윤계득의 집을 적소로 정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이 그를 다시 鞠問국문(죄를 묻는다)하도록 요청하여 서울로 압송하던 중 6월 7일 정읍에서 숙종이 내린 사약 먹고 사사된다.


1694년 갑술옥사 뒤에 서인이 집권하자 伸寃신원(역적의 누명을 벗음)되고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문묘에 배향한다.

제주 유생 김성우 등은 1695년(숙종 21) 2월에 상소하여 송시열을 귤림서원에 배향하였다.

지금 오현단 서쪽 암벽에 새겨져 있는 ‘증주벽립’의 필적은 송시열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역대 왕들보다도 많이 인용된 대쪽 선비로 3,000여번의 우암이 등장한다.

1998년 대전시는 남간정사 옆 계곡에 터를 닦고 <우암사적공원> 건립한다.

송시열 적거터 :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1동 1317  


※ 송시열 적거 유허지 현장에 세워졌던 빗돌이 사라져 안타깝다.

    동사무소에선 누가 빗돌을 가져갔는지 아직도 이 빗돌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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