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chitect shlee Mar 17.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I 경기 수원화성 1/3

다섯. 정조의 꿈 수원 화성이야기 3

영화 역린처럼 빨래방에서 일하던하인이 정조에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정유년 7월 28일 밤 11시경 정조가 머물고 있던 경희궁에 자객이 침입했던 흔적이 발견되어 금위대장 홍국영을 불러 대궐을 수색하게 하고 지붕 위에 자객이 침투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정조는 거처를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우포도 대장으로 구선복을 세워 8월 9일 정조를 암살하기 위해 담을 넘던 범인을 붙잡게 된다.

홍국영은 정조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다.

정조의 오른팔이었던 홍국영은 본관 풍산(豊山),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가 세거지에서 자라고  1771년 정시로 문과에 급제, 세조시강원 설서후 벽파의 영수 정후겸 제거하지만 욕심을 누르지 못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홍국영은 여동생을 정조에게 시집보낸다.

후사도 없이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 1년 만에 병사한다.

차세대 대비하기위해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둘째아들 상계군을 원빈 홍 씨의 양자로 들이고 눈의 가시인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다발각되어 역모로 유배보내지고 33살에 병사한다.

이산의 내용중 구선복장군을 제외한 노론전부를 죽인다는 내용과 정재영의 역할은 허구다.


1777년 정유년에 정유역변(이 난을 정유역변이라고 부름)을 일으킨 할마마마 정순왕후[貞純王后,1745~1805]는 죽지 않는다.

정조의 꿈 화성.

조선 제 21대 왕 영조는 자신의 아들 장헌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굶겨 죽인다.

이때 장헌세자 27살.

뒤늦게 사도(思悼:생각할수록 슬프구나 아들아)라는 시호(諡號:왕이나 선비가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해 붙인 이름)를 내린다.

사도세자는 정조외에 후궁과의 사이에 세 아들이 더 있다.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15년 동안 절치부심하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조선 제22대 왕에 올랐다.

부친의 죽음에 관여한 노론 전부 사형시키고 동대문구 배봉산에 모신 부친의 묘를 이장을 계획한다.  

수원(水原:물이 많은 동네)의 꽃이 만발한 빛나는 산, 화산化山이 명당이라 그곳으로 향한다. 정조는 부친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고 현릉원(顯陵園 귀하신 부모가 잠든 곳)으로 승격한다.

* 원園: 왕과 중전의 묘는 능, 왕의 생부나 왕세자의 묘는 원.

다시 현릉원을 융릉(隆陵 융성한 무덤)으로 다시 승격시킨다.

왕궁은 노론들이 80년간 점령 중이고 당파싸움이 그칠줄 모른다.  

우문지치(右文之治 학문중심의 정치)을 선포하지만 신료들은 들은 척도 안한다.

그럼 작성지화(作成之化 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로 돌린다.

이미 한양의 온갖 이권을 꿰차고 있는 노론이 말을 들을 리 없고 아예 왕궁을 새로 만들어 조선의 번영을 이루겠다하여 수원에 신도시 조성 시작한다.

성묘가기도 좋고.  

새로운 성의 이름은 사도세자가 잠든 꽃으로 뒤덮인 산, 화산에서 음을 따고 화규삼축(華封三祝:중국의 한 신하가 왕에게 3가지를 축원했다. 자손 번창하시고, 부자 되시고, 오래 사십시오)의 화자 를 써서 화성華城이라 하고 그 뜻은 효를 통해 덕을 펼치는 도시로 한다.

거중기는 1.5톤의 돌덩어리를 훌쩍 들어 올린다.  

연인원 70만 명 동원하는데 민주국가를 꿈꾼 정조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일당을 지급했다.

동서남북문 완성.


동문 蒼龍門 창룡문(푸른 용이 다니는 문),

서문 華西門화서문(서쪽의 빛나는 문),

남문 八達門팔달문(전국 팔방으로 통하는 문),

북문 長安門장안문(수도 서울로 통하는 문)


성둘레 5.7km 6만평의 화성이 완성된다.

왜놈들의 침략을 대비해서 벽돌을 달팽이 모양으로 쌓아 올려 만든 군 초소 공심돈을 새로 지어 올린다.

정조의 능행길엔 수행인원 6천명에 말만 1,400필.

지금의 한강철교 북단 노량진나루터 역장은 정약용.

노량진나루터에는 관선이 15척.

한강에서 운행 중인 관선은 다 모아도 60척.

그래 민간인 선박에 총동원령 내리고  집결된 800척을 쇠줄로 묶고 철판 깔아 다리를 만든다.

정조는 무사히 배다리를 건너 장승백이 도착한는데 비도 오고 분위기가 어째 을씨년스럽다.

그래 이 마을에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명에 의해 장승이 세워진다.

동네가 장승이 서 있어서 장승백이가 된다.

장장 1km에 이르는 정조의 성묘 가는 행렬이 드디어 화성의 북문 장안문 들어서니 576칸의 장대한 화성 행궁이 펼쳐진다.  

조선 최초의 민주적인 군왕 정조는 이상도시인 수원 화성으로의 천도를 꿈꾸지만 1800년 의문의 죽음.

유언은 이렇다.


부친 곁에 묻어 주라.


지극한 효성.

부친 묘소인 융릉 곁에 정조 모시고 건릉健陵 건립.  


1910년 나라가 망했다.

왜놈들이 화성에 도착했다.

수원성으로 명칭을 바꾼다.

그래 위대한 화성은 지방의 작은 읍성으로 지위 격하되고 전각 다 때려 부순다.  


1996년 화성 건립 2백주년을 맞아 인구 1백만 명의 수원시는 화성 복원에 나선다.

관광객 유치가 목표.

별다른 문화재도 없고.

2003년 봉수당 등 482칸 복원.

2010년 완공.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매거진의 이전글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경복궁 3/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