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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Mar 16.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경복궁 3/4

열셋. 조선의 제1법궁 경복궁 3

조선의 제1法宮법궁, 경복궁 세번째이야기

; 조선 전기의 경복궁과 그 역사


경복궁이 사용되지 않았던 시간들을 중심으로 이번엔 전기에서 중기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왕권의 복원과 조선의 부활을 꿈꾸었던 후기조선의 이야기를 연다.

오늘은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이야기와 강녕전, 교태전, 동궁에 대하여 적는다.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을 통과하면서 왕들의 공간이 시작 된다.

첫번째로 마주하는것이 의전공간인 근정전.

그 다음이 집무공간인 사정전,

그리고 뒤로 왕과 왕비가 잠을자는 침전 강녕전과 교태전,

교태전 뒤로는 후궁과 궁녀 공간인 수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남은건 함화당과 집경당이 있고

떠오르는 태양인 세자의 거처는 근정전의 동쪽에 위치한 동궁이 있습다.


- 조선 왕실의 상징 勤政殿근정전

인왕산과 북악산을 병풍삼아 우뚝 솟아있는 경복궁에서도 제일 웅장한 건물이 勤政殿근정전이다.

근정전은 국가의 중대한 의식을 거행한 건물로 경복궁의 중심이었다.

근정전의 이름에 얽힌 사연도 재미 있다.

이름을 처음 지은 인물은 경복궁건설의 주역 정도전이었다.

「勤政근정」이란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이다.

정도전은 편안히 쉬기를 오래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기 때문에, 왕은 무릇 부지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도전이 모든 일에 부지런해야 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할 바’를 알아서 부지런히 정치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왕이 부지런히 해야 할 것으로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왕이 부지런히 할 바를 알고 부지런해야 했던 곳 근정전, 근정전은 조선정궁의 정전답게 이곳에서는 수많은 의식과 행사, 그리 고 역사를 흔든 사건이 있었다.

근정전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의식은 왕이 신하들의 朝賀조하(왕에게 하례하는것)를 받는 의식과 역대 왕의 즉위식이었다.

하지만 경복궁이 조선전기에만 정궁으로 기능을 한 만큼 이곳에서의 즉위식을 거행한 왕은 정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의 7명으로 확인된다.

태조는 개성의 수창궁에서 공양왕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고, 태종 역시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태종이 상왕으로 올라가면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즉위식이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즉위식을 제외하면 근정전에서 행해 진 대부분의 즉위식은 슬픈 즉위식이었다.

선왕이 승하한 후 장례의식이 엄수되었기때문이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궁궐전각 밑에 놓인 섬돌)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만들고 2층 건물을 올렸는데,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이다.

회랑으로 둘러싸고 평평한 돌을 깐 근정전 앞마당이 바로 朝庭조정이다.

근정전 월대 위에는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난간을 두르고 청룡 . 백호 . 주작 . 현무의 四神사신과 십이지신 등을 조각해 놓았다.

이는 근정전의 위상과 법전으로서의 격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단 좌우측에는 향로가 있습니다. 이는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근정전에서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향을 피우던 儀器의기다.

궁궐의 주요 전각에 넓적하게 생긴 큰 독 ‘드므’를 설치하고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하늘의 火魔화마가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놀라서 도망감으로써 화재예방을 위한 것이다.

남쪽 회랑에 勤政門근정문을 두었고 그 바깥에 다시 외행각을 둘러 또 하나의 마당을 조성했으며, 외행각 남쪽에는 興禮門흥례문을 내었다.

근정전은 국보 제223호, 근정문 및 행각은 보물 제812호.


朝庭조정에 깔려 있는 화강암은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다듬었다.

조정 한가운데 주변보다 약간 위로 올라온 길은 御道어도라 하여 왕만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정전 안마당에 두 줄로 돌이 12개씩 꽂혀있는데, 이 돌을 품계비라고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국무총리 이하 9급 공무원까지 9개의 직위로 나뉘어져 있듯이 조선도 마찬가지로 자기 직급의 높고 낮음을 알려주는 돌로 만든 공무원신분증이 품계비인것다.

글구 왜 두 줄이냐면 우측에는 선비들이 좌측에는 군인들이 죽 줄을 서는, 그래서 우측의 선비인 문반文班과 좌측의 군인인 무반武班을 합쳐 양반이라고 부르는 거죠.  

매달 4번씩 모든 벼슬아치가 함께 모여 임금에게 문안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조회朝會가 이 안마당에서 열렸는데 많게는 수백명의 사람이 모이니까 선비와 군인을 포함한 모든 벼슬아치를 문무백관文武百官이라고 하는것이고 국민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문무백관의 형제자매라는 뜻으로 국민을 백성이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품계석 앞에 신하들은 자리를 깔고 앉았는데, 자리는 품계에 따라 표범가죽, 호랑이가죽, 양가죽, 개가죽으로 차별을 두었다.

조선전기 정궁 경복궁의 중심 공간인 근정전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폐허가 되면서 역사 속에서 잊혀진다.


왕의 집무공간 政殿사정전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


사정전은 왕의 공식적 집무실인 便殿편전으로, 그 이름에는 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매일 아침 업무보고와 회의,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사정전에서는 매일 새벽 3~5시 사이에 ‘상참(常參)’이라는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연산군대에 상참과 경연이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다.

사정전 좌우에 있는 萬春殿만춘전과 千秋殿천추전은 온돌방을 갖추어 사계절 이용이 가능한 보조 편전이다.

조선초기에 이 건물들은 복도로 연결되었으나, 고종 때에는 독립된 건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현재의 사정전은 1867년 근정전, 경회루 등과 중건한 것입니다. 만춘전은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88년에 복원했다.

사정전 앞의 행각은 왕실 재물을 보관하는 내탕고로 이용했다.

보물 제1759호

이곳도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 세종은 공놀이(打毬)를 즐겼다고 한다.

打毬타구는 장치기라고도 했는데, 길 위에 여기저기 구멍을 파놓고 긴 막대기로 둥글고 작은공을 쳐서 그 구멍에 들어가게 하는 놀이다.

오늘날의 골프와 비슷하다.

구멍은 가능하면 공이 잘 들어가기 어려운 자리에 움푹하게 만들었는데, 아슬아슬한 승부를 맛보게 하기 위해 다리 끝과 같은 곳에 파기도 했다.

타구에 쓰이는 공의 크기는 달걀 정도였고 나무나 차돌멩이로 만들었다.

각자의 공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재미있는 이름을 공에다 붙이기도 했고.

공을 치는 채의 모양은 긴 숟가락처럼 생겨 오늘날의 골프채나 하키채를 연상시킨다.

세종은 왕자시절부터 하인들과 어울려 타구를 했다.

특히 날씨가 추워 궁궐 밖에 나가기 어려운 겨울부터 연초까지 이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세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여, 타구를 막대기로하는 놀이라는 점에서 봉희라고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사정전 남랑(南廊)에 나아가서 종친의 봉희를구경하였다.


사정전 앞에서는 역사를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사육신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해 이곳에서 세조에게 국문을 당한 일이죠.

1456년 단종복위 운동을 주도한 성삼문, 박팽년 등의 거사가 김질 등의 고변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난 일이다.

세조실록에는


왕이 사정전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등을 끌어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黨與당여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신의 아비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고 기록하여 세조의 친국이 벌어진 현장이 사정전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세조는 사정전에서 친히 거사 참여자들을 국문하면서 협박, 회유하려 하였으나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세조의 왕위 찬탈의 부당성을 공격하면서 그 뜻을 굽히지 않았고 특히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칭하여 세조를 자극하였다.

또한, 그는 세조의 신하가 아니기 때문에 세조가 준 녹봉을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였고, 달구어진 쇠로 고문을 더욱 모질게 가했다.

이날 사정전에서 벌어진 상황은 「연려실기술」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최고의 借景차경지, 경회루慶會樓

태조대인 1395년 경복궁 창건 당시 경회루는 없었다.

1412년(태종 12) 태종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한후, 西樓서루가 기울어지고 위태하자 태종은 누각의 수리를 지시하였다.

공사의 총감독은 공조판서인 박자청(朴子⾭)이 맡았다.

박자청은 노비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건축 기술을 인정받아 종1품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한양은 내사산인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 외사산인 용마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이 감싸 안고 있는 명당.

외산의 남쪽을 막아서고 있는 관악산이 걱정이된다. 이 산이 워낙 불꽃형상의 불타는 화산이라. 왕궁에 화재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그래서 ,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걸었다.

<주역>의 오행사상에 따르면 숭례문의 예禮는 오행(木火土金水)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

더구나 남쪽은 불을 나타내는 방향이므로 이를 합치면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띤 염炎자가 되어 관악산의 화공을 누를 수 있을 것이라...

박자청은 경복궁 서쪽의 땅이 습한것을 염려하고 관악산의 화공에 대비하며 樓루를 에워서 못을 파고 경회루를 건설하니다.

누각이 완성되자, 태종은 이 누각의 이름을 지을 것을 명하였고, 하륜이 그 이름을 경회루라 정하였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공자께서 노나라 애공(哀公)의 물음에 대답하시기를,

“정사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사람을 잘 얻고 잘못 얻는 데 있다.”하셨다.

대개 인군(⼈君)의 정사는 사람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사람을 얻은 뒤에 라야  ‘경회(慶會)’라 이를수 있을 것이다.

......‘경회’라는 것은 군신간에 서로 덕으로써 만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니, 마치 주역 건괘(乾卦)의 구오(九五)가 그 대덕(⼤大德)으로써 구이(九⼆二)의 대덕을 보고, 지기(志氣)가 서로 맞아서 그 도를 행하는 것과 같이하면, 모든 어진 이가 부류대로 나와서 국가가 창성하게 될 것이니, 이른바 구름이 용을 따르고 범이 바람을 따른다는 것이다.

…⋯ 옛일을 상고하건대, 요·・순·・우·・탕·・고종·・문왕·・무왕 같은 이가 임금이 되고 고요(皐陶)·・기(夔)·・백익(伯益)·・이윤(伊尹)·・부열(傅說說說)·・여상(呂呂尙)·・주공(周公)·・소공(召公) 같은 이가 보좌가 되면 참으로 경회라 이를 것이다.

- 동문선 제81권 慶會樓樓記경회루기, 하륜


이름을 짓자, 태종은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경회루’라는 글씨를 쓰게 하여 그것을 편액으로 삼았다.

가로 128m, 세로 113m.

장장 5,000평에 이르는 대형 인공연못 조성하고 경회루를 연못 위에 띄운다.

연못 만드느라 퍼낸 흙은 교태전交泰殿 뒤에 흙을 쌓아 아미산(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산이 아미산峨嵋山) 만든다.

북악산의 정기 받아 왕자들 쑥쑥 생산하게.

왕비마마의 침소 이름은 교태交泰 하늘로 솟는 양과 땅으로 가라앉는 음이 화합해 왕자 생산하는 방.

1592년 임진왜란때 경회루를 비롯한 모든 전각 전소하고 역대 왕들 경복궁 기피하여  덕수궁, 창덕궁 전전하며 셋방살이하게 된것.

1867년 고종 4년 대원군이 나선다.  

경회루 북, 서, 남쪽에 다리 3개 축조. 해와 달, 별이 건너는 다리. 그중 남쪽 다리는 왕만이 건너는 다리.

우선 1층에 바깥쪽으로 24개의 사각 돌기둥을 돌리고 안쪽으로 24개의 원기둥을 돌린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반영한 것이고.

1층 바닥에는 전돌을 깐다. 바깥 전돌은 좀 낮게 안쪽 전돌은 좀 높이 깔고 그래야 단에 부딪친 바람의 속도가 빨라져서 환풍이 잘되니까.

전면 7칸 측면 5칸. 전체 칸수는 35칸+주변의 비어 있는 허공도 태극의 하나. 육육궁(8궤에서 6은 큰 물을 뜻하ㅐ서 궁을 지을 때 6의 배수로 지어 화재에 대비하는 거)의 원리에 따라 36칸이 원칙이다.

2층 올라가면 마루판 깔린 누각은 3겹. 바깥쪽 외진 24칸은 신료들 자리. 중간 내진 12칸은 사신 자리. 중앙의 내내진 3칸(천지인天地人. 하늘과 땅, 사람이 함께 앉아야 되니까)은 당연히 왕의 자리.

내진 12칸은 1년 12달, 외진 24칸은 24절기 상징.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높아지고. 단차이로 신분 구분.

여기에 물이 돌기 위해 인공섬 두 개 더 만든다.

경회루 북쪽 연못에 청동으로 만든 용두마리를 넣습니다. 물을 생성하는 용이 불을 제압하는것.

북쪽에 있는 육각정은  하향정으로 이승만대통령이 낚시하던 정자다.

동쪽으로 낙산, 서쪽으로 인왕산, 남쪽으로 남산, 북쪽으로 북악산이 서로 넘실넘실 넘어 서로 관통하고 화합하는 생명력은 그대로 연못에 비춰지고 하늘과 땅을 끌어안고 바람과 구름을 엮어 환영으로 존재하는 경회루.

경회루는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연산군에게 있어 경회루는 쾌락의 공간이었다.

흥에 겨워 즐기거나 돈을 마구 쓰는 모양새를 일컫는 ‘흥청망청’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부분 연산군, 경회루와 관련이 있다.

연산군은 조선의 아름다운 여성을 선발해 運平운평이라는 기생으로 만들었는데, 이들 중 궁궐로 뽑혀 온 기생을 興淸흥청이라 하였고 연산군은 경회루 등에서 흥청들과 함께 유흥을 즐겼고, 결국 ‘맑음을 일으키는’ 흥청은 ‘맑음을 망하게’ 하는 망청이 되었다.


왕과 왕비의 寢殿침전 康寧殿강녕전, 交泰殿교태전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을 寢殿침전이라고 한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 고종명(考終命,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의 오복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강녕’의 의미를 담아 이름 붙여졌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정(井)’자 모양으로 9개의 방을 구성하여 한가운데 방은 왕이 사용하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이 숙직을 하였다.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1440년(세종 22)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兩儀門양의문까지도 음양을 의미하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으니, 왕과 왕비가 만나 잘 교통하여 후손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뜻을 중전의 침전에 담고자 한 것이다.

양의문은 강녕전의 대문인 향오문과 특히 다른 점이 있다.

향오문은 두 짝으로 둔중한 데 비해 양의문은 여섯 짝으로 가볍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교태전은 여인들의 처소였으므로 여인들이 힘 들이지 않고 여닫을 수 있도록 배려한 조상들의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 있다.

전하와 중전의 어원 우리가 일반적으로 왕의 호칭으로 알고 있는 ‘殿下전하’는 궁궐의 전각과 관련 있는 말이다.

‘전하’는 전각 아래에서 엎드려 우러러본다는 극존칭의 의미로 ‘○○전(殿)’에 사는 왕이나 왕비에게 붙이는 것이다.

왕비의 침전은 궁궐 한가운데 있고 궁궐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중궁전(中宮殿)’이라 하고, 왕비는 ‘중전(中殿)마마’라 칭한다.

세자가 거처하는 곳은 내전의 동편에 배치하고 그 지역을 동궁(東宮)이라 불렀다.

세자를 동궁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교태전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습니다.

계단식 화단과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 낸 굴뚝(보물 제811호)이 아름답다.

1917년에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일제는 목재를 조달한다는 명분으로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

현재의 강녕전과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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