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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Feb 07.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 유배지 목관아

유배지 乇羅탁라 그 첫번째 장소,  목관아

제주는 버려진 땅으로 탐라국은 662년 신라의 속국이 되기 전까지는 독립국가였던 곳이다.

925년 독립하지만 1105년 다시 고려의 속국이 되어 이제 탐라군으로 행정정리된다.

1273년 삼별초의 난 이후는 원나라 속국이 되었다가 1367년 다시 고려 속국이 된다.

1402년 다시 조선 속국이 되는 동안 가장 먼 유배지로나 사용하는 척박한 섬.


이 눈물로 얼룩진 제주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200여 명이 유배를 왔는데, 왕족과 외척, 문무양반, 학자 등은 물론 도적과 국경을 넘다 잡힌 범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유배인들이 있었다.

조선 500년을 통해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숱한 인사들이 제주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사 중 하나가 추사 김정희.

그 유명한 세한도와 추사체가 제주 유배생활 중 완성됐다.

추사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 국보 “세한도”가 완성된 곳,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이름이 등장한다는 송시열의 마지막 유배지, 조선시대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왕인 광해군이 삶을 마감한 곳인 제주에는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호령하던 유배인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있다.


제주유배길은 제주의 유배인들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장이다.

유배인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 걸으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기약하는 이 길이야 말로 시대를 뛰어넘으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길이다.

추사 유배길, 면암유배길, 성안 유배길이 개발되었지만 공식적으로 활발히 이어가는 추사 유배길과 그나마 뜸하지만 발길이 이어지는 면암유배길에 비해 제주시내의 사람들의 접근이 좋아 크게 몰릴것 같던 성안 유배길은 거의 버려져 있다.

어쩌면 다양한 유배인들의 자취를 볼 수 있는 성안 유배길이야 말로 진정한 인문투어가 아닐까…


그 첫번째 장소 목관아.

유배인이 제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 바로 제주목 관아였다.

광해군,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등 당대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이 곳에 들러 제주목사에게 유배인이 도착했음을 알려야 했다.

얼마 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이 일개 지방 목사에게 자신의 당도를 아뢰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유배인이라고 해서 제주목사가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당장은 유배인의 신분이지만 언제라도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주목사는 유배인의 생활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며 후일을 도모하곤 했다.


제주의 역사와 함께했던 제주목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건물이 헐려 관덕정만 남아 있다가 오랜시간 복원작업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입춘이 되면 탐라시대부터 이어지던 문화축제인 탐라국 입춘굿 놀이가 열려 제주시청에서부터 제주목관아까지 낭쉐(나무로 만든 소)를 몰고 가면서 한해의 무사안녕을 빌고있다.

제주시내에 고즈넉히 옛자취를 지키고있는 제주목 관아지이다.

제주 목관아 일대는 옛날 탐라국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역할을 해온 유서 깊은 곳이다.

제주목관아터는 제주시 삼도1동 관덕정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朝鮮時代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濟州牧제주목 관아는 지금의 觀德亭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耽羅國탐라국시대부터 星主廳성주청등 주요 官衙施設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어지는 역사적 기록인 <탐라순력도>와 <탐라방영총람> 등의 문헌에서 제주도 중심 관아터임이 확인되어지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世宗 16) 官府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役事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骨格)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重·改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때 毁撤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제주시에서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문헌상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弘化閣홍화각·延曦閣연희각·友蓮堂우연당·橘林堂귤림당등의 건물터와 遺構유구가 확인되고 유물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등을 토대로 하고, 『耽羅巡歷圖탐라순력도』와 『耽羅防營總覽탐라방영총람』 등 당대의 문헌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관아지 복원기본설계를 완료하였다.


민관(民官)이 합심하여 복원하게 된 제주목 관아는 1999년 9월에 시작하여 새로운 세기인 2002년 12월에 복원(復元)을 완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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