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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Jul 06.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V 전라 해남 녹우당

스물하나. 순천을 돌아 여수와 해남으로 02 海南해남 綠雨堂녹우당

척박한 땅, 귀향지 海南해남

바다의 남쪽시작인지, 땅의 남쪽 끝인지....

조선시대 귀양 인사는 700여 명 중 245명이 전라도 땅으로 유배됐고, 이중 120여 명 바로 해남이었다.  


漁樵隱어초은 尹孝貞윤효정

; 고기 잡고 땔나무나 하면서 숨어 살겠다 1476-1543.


1501년 해남읍 연동리 2만평에 집 짓고 안빈낙도.

noblesse oblige…

三開獄門 積善之家 삼개옥문 적선지가

(가난해서 세금을 내지 못한 백성들이 감옥에 갇히자 어초은이 세금을 대신 내줘 세 번이나 감옥에서 꺼내줬다)

尹善道 윤선도
어초은의 후손 孤山고산 尹善道윤선도.

; 따로 떨어져 있는 산


17세에 진사초시 합격.

광해군의 오른팔 이이첨과 붙었다.

당연히 고산은 31살에 유배 길에 오르고.


1623년 인조반정. 이이첨 사형.

고산은 6년 만에 복권되어 의금부도사가 되지만 3개월 만에 사직하고 낙향한다.

42살에 별시 문과 장원하여 왕세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된다.

장남 인미, 차남 의미 사마시 합격.

어초은에서 시작된 5대 째 과거 급제.

48세에 고산은 가족들 데리고 해남으로 이사.

50세에 차남 병사.

51세에 병자호란으로 조선 제16대 왕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원손대군은 강화도로 도망한다.

고산은 자비로 배를 빌려 의병군 싣고 해남에서 강화도로 출발하지만 이미 청에 함락되고 제주로 배를 돌린다.

甫吉島보길도(볍씨가 좋은 섬), 부용동에 樂書齋낙서재(즐겁게 글 쓰는 집) 짓고 정착하지만 남한산성의 왕을 버리고 떠났다는 죄명으로 영덕현으로 다시 유배.  

1649년 제자인 봉림대군 우여곡절 끝에 조선 제17대 왕 등극한다.

고산은 65세에 다시 부용동으로 간다.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200.

명승 제34호


고려 때부터 전하던 <어부가>를 이현보가 9장으로 고쳐지었고, 다시 윤선도가 시조의 형식에 여음만 넣어 1651년 <어부사시사> 완성.

봄, 여름, 가을, 겨울 노래로 나뉘어 각각 10수씩 모두 40수.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을 다섯 벗으로 삼아 서시(序詩)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들의 특질을 들어 자연에 대한 사랑과 관조를 표백.

어부사시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이 되고 72세의 고산에게 효종은 수원에 스승의 집을 내린다.  

효종 승하하자  74세에 다시 삼수로 유배가고 82세에 수원 집 해체된다.

녹우당 배치도
녹우당 조감
綠雨堂녹우당

고향집 안채 앞에 사랑채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 산기슭 비자나무에 한바탕 바람이 몰아치면 우수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30대 때 함경도 경원과 경상도 기장 등을 전전하며 7년.

50대 때 경상도 영덕에서 1년.

70대 때는 삼수와 북청, 광양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며 6년간 귀양살이.

통산 14년간 유배 생활 끝에 광양을 마지막으로 해배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이미 81세.

그는 해배된 이후 1개월간 해남에 머물다 곧바로 보길도로 들어갔다.

洞天石室동천석실(늘과 통하는 산중의 방)에서 칩거.

동천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

부용동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정자를 설치해 놓고 책을 읽는다.

85년을 살면서 벼슬생활 9년에 유배생활은 14년.

그의 재산은 모두 직계 후손들에게 물려줬으나 이 부용동의 사재만은 후첩 들 중 한 명의 어머니에게 물려줬다.

보길도의 윤선도 유적지는 144,000평.

1993년 340억 투입해 복원한다.

집을 향해 들어가다 보면 마을 어귀쯤 되는 곳 오른쪽에 나지막한 둔덕이 꾸며져 있고 네모난 연못이 파여 있다.

못 주변에는 해송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으며 못 안에 마련된 두 개의 네모난 섬에도 해송이 심어져 있다.

요즘은 연못을 별로 가꾸지 않는 듯하고 사람들도 관심없이 지나치곤 하는데, 이 못 있는 곳이 녹우당의 앞뜰이 되는 셈이다.

대문 바로 앞에는 높이 30여 m에 이르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500년 가량 묵었다고 한다.

집 전체가 ㅁ자형을 이루며 안뜰을 둘러싼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가 여러 동 있고 집 뒤편 담장 너머에 삼신제단이 있으며 그 동쪽에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과 윤선도의 사당이 있다.

전체의 규모 60여 칸 가운데 집주인보다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소용되는 공간이 더 넓어서 대지주 계층의 살림살이를 보여 준다.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있는 작은 못가와 안뜰의 입구 쪽에 여러 가지 꽃나무가 가꾸어져 있고 사당이 있는 후원 쪽에는 갖가지 과일나무들과 함께 채소밭이 꾸며져 있다.

짙은 대밭이 폭 감싸듯이 집 뒤를 둘렀다.

추사가 녹우당을 찾아 하루 자고 가면서 숙박비 대신 현판을 하나 쓴다.

一爐香室 일로향실(한 개의 화로로 온방이 향기롭다)

1679년 숙종은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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