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chitect shlee Feb 12.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Prequel 상고사

제주 상고사와 생각해 볼 문제들...

제주는 유난히 사랑하는곳이다.

앞으로 장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정착할 곳이고 더욱이 최근 사랑하는 소꼽친구가 살고 있다는걸 알게되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삼국유사 황룡사구충탑 건립 목적이 적혀 있는데 이곳에 탁라(제주도)가 나온다.

아, 오타가 아니고 원래 지명이 탐라가 아니고 탁라가 맞다.

제주도를 탁라국이라 하였으며 신라가 제압해야 할 9개의 적국으로 간주하였다.

그때까지도 제주도는 독립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제주도를 구한(九韓)이라는 동족 의식이 있으면서도 신라를 침범하는 나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는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국이었으며 독립국이었음이 드러난다.  

선덕여왕(~647) 시기에 제주도에서 신라까지 와서 영토를 유린하였다기보다는 신라의 항해길을 막았다고 볼 때 항해술도 대단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들이 구한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의 언어 문화 등이 신라와 유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罹>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黃)龍寺, 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眞), 第九層穢貊.

三國遺事3卷 皇龍寺九層塔 삼국유사 3권 황룡사9층탑

9층 탑은 1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신라가 복속하기 전까지 이렇듯 강한 국가의 면모를 보여 온것이다.

재밌는 역사...

영조 때의 기록에 제주도민의 사고가 담긴 글이 있다.

이것에서도 재밌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제주의 시조 고·부·양 3을나의 사당에 사액을 청한 제주 유생 고한준의 상소  -영조 5년 기유(1729)

제주(濟州) 유생(儒生) 고한준(高漢俊) 등이 상소하기를,


탐라(耽羅)는 곧 옛적의 탁라국(乇羅國)입니다.

먼 옛날에 세 신인(神人)인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가 9백 년 동안을 정립(鼎立)하다가 인심이 하나로 돌아가 고씨(高氏)가 임금이 되었고, 신라(新羅) 때에는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고계(高季)란 사람 3형제가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가 비로소 내부(內附)가 되기를 청하므로 신라 임금이 이름을 내리어 맏이는 성주(星主), 가운데는 왕자(王子), 막내는 도내(都內)라고 하였으며, 양을나의 후손에게는 신라 말엽(末葉)에 성을 양(梁)이라고 내렸고, 고씨의 외손 문씨(文氏)가 또한 계승하여 왕자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 태종조(太宗朝)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 등이 명칭이 참람함을 들어 고쳐 주기를 청하여 윤허받음으로써 성주와 왕자의 이름이 비로소 혁파되었습니다.

신들이 그윽이 한 칸의 띳집에서 주 소왕(周昭王)을 향사(享祀)하는 의리를 붙여 사당을 창설하여 고(高)·부(夫)·양(梁) 3을나(乙那)에게 향사(享祀)하되, 성주 고후, 왕자 고청, 도내 고계와 고봉례·문충세를 배향(配享)했습니다.

바라건대,

한(漢)나라와 송(宋)나라의 고사(故事) 및 우리 동방(東方) 역대의 조묘(祖廟)와 삼성사(三聖祠)의 예에 의거하여 사액(賜額)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탐라는 신라·고구려·백제와는 다르다.

하물며 전조(前朝)에서 우리 국조(國朝)에 들어온 지 몇 백년이 되도록 시행하지 않은 일을 이제 와서야 소청(疏請)을 함은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또 전대(前代)를 추념(追念)하고 옛적의 현자(賢者)를 사모하여 사우(祠宇)를 세우는 일은 혹 위에서 처분을 내리게 되거나 혹은 아래에서 청하여 하게 된 것은 있었다.

이는 그렇지 아니하여 마치 고국(古國)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같이 되어 있으니, 과연 사체에 맞는 것이겠는가?

상소 내용에 한 칸의 띳집에서 주소왕을 향사한다는 말은 특히 친착(襯着)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번읍(蕃邑)으로 작정하여 신하 노릇을 하고 백성 노릇을 하게 된 지가 또한 몇 백년이 되는데 감히 이러한 말을 장주(章奏)에 올렸으니, 이 상소를 도로 내주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이 상소문에 영조는 다소 역정을 낸다고 볼 수 있다.

주 소왕(BCE995?-BCE977?)이 등장함을 믿기 어려워한다.

주 소왕은 대륙의 서쪽에 치우친 주 나라를 동쪽으로 넓힌 정복 군주였으나 한수(漢水)에서 실종됐다.

이 왕이 실종되었다고 제주도 사람들이 제주도에 왔다고 믿고 자신들의 왕 또는 신으로 삼고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제사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제주도의 신,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를 믿는 바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주소왕을 섬긴다는 사실을 못마땅하다는 거다.

그래서 사액을 내리면 경비 일체를 공식적으로 지불하게 되는데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제주도는 섬이다.

풍랑에 표류하여 사는 일이 많았을 것이고.

그래서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왔다가 돌아갔다고 믿는것이다.  

정방 폭포.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巿)이 돌아간 지점이라는 정방폭포에는 서불과차(徐市過此)가 음각되어 있다.

진시황의 사자 서불이 왔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고 정방폭포에 새겨진 글씨는 서불이 새긴 것일 수 없다.

여행 중에 바위에 글씨나 새기면서 돌아다니진 않을것이다.  

제주도민이 자신들이 사는 곳이 불로초가 사는 지상낙원이라는 자존의식의 결과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에 중국 선단이 제주도까지 올 수 있는 항해술이 있을까도 의심스럽기도하고.

진시황의 나라는 대륙의 서쪽에 위치하여 배를 탄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에 제주 선비의 고한준의 말차럼 주소왕(周昭王)의 사당이 있었고 제주도민이 모두 이를 존숭하였다면 제주도민은 한반도가 아닌 중화지향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영조가 경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V 제주의 식생 유채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